오사카 ‘고대 백제인’ 말사육 유적 확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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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용파더 | 2010/11/25 15:28 | 다국시대(펌) | 트랙백 | 덧글(0)

집중분석, 고조선인은 어떻게 살았나?

[역사스페셜]


집중분석, 고조선인은 어떻게 살았나?



아주 먼 옛날 ,한반도와 요녕지역에 걸쳐 세력권을 형성했던 고대국가가 있었습니다. 우리 역사상 최초의 국가, 그 이름은 고조선입니다. 고조선에 관한 기록과 유물유적이 워낙 적기 때문에 고조선이 어떤 사회였는지 파악하기는 쉽지 않습니다. 지금까지 고조선에 대한 주요 관심이 주로 영역은 어디까지였고, 국가체제는 어떠했나 하는 것에 머물렀던 것도 그런 이유이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최근 청동기 시대의 유적들이 하나 둘 발굴되면서 그 동안 베일에 싸여있던 고조선 사람들의 생활상이 서서히 드러나기 시작했습니다. 고조선시대에 철기가 도입되긴 하지만 그것은 말기였고 대부분의 기간은 청동기 시대에 해당합니다. 청동기 시대는 지금으로부터 2300여 년에서 무려 4천 년 전까지 거슬러 올라갑니다. 그야말로 까마득한 옛날이라 아마도 청동기 시대하면 무척이나 원시적인 생활을 했을 것이라고 생각하시는 분이 많을 텐데요.


고조선 사람들의 생활이 과연 그랬을까요?

어쩌면 우리의 상상과를 전혀 다른 삶을 살고 있지는 않았을까요?


고조선 사람들은 어떻게 살고 있었는지, 그 시대의 마을로 들어가 보겠습니다.

 


울산 검단리 마을엔 농촌 어디서나 볼 수 있는 나즈막한 언덕이 있다. 이 언덕을 중심으로 넓게 펼쳐져 있는 논밭에서 지난 1990년, 아주 오래된 유적이 드러났다. 4000평 크기의 전망 좋은 언덕, 이곳은 지금으로부터 2600년 전, 청동기 시대 마을 터였다. 검단리에서 출토된 유물은 현재 부산대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석검을 비롯해 그 대부분이 돌로 만든 석기들이다. 2600년 전 검단리 사람들이 사용했을 이 유물 은 오랜 세월 속에 묻혀있던 청동기인들의 삶을 보여주고 있다. 모두 3개월에 걸친 발굴조사 결과 검단리 마을에서는 93개의 집터가 드러났다.

 

  

 

그 중 가장 많은 수를 차지하고 있는 것이 이 정정사각형 모양의 집터다. 그런데 특이하게도 이 집터에는 똑같이 네 개의 구멍이 보인다. 구멍 위치도 정사각형 각 모서리의 안쪽으로 일정하다. 이 구멍은 무엇일까 ?


전옥련 부산대 박물관 학예연구실장

인터뷰) 주거지 내부에서 일단 기둥이 설치되어야 되는 지점에 일단 정형화되어 나타나고 있습니다. 그리고 어짜피 이게 집으로 가옥으로 만들어 진 것이기 때문에 지붕을 꼭 필요하고 그리고 나오는 위치라든지 이런 것으로 봤을 때 기둥으로 볼 수밖에 없는 이런 흔적들이거든요.

 

 

집터에서는 기둥의 재료를 파악할 수 있는 단서가 발견됐다. 기둥의 탄화재였다. 이 탄화재를 분석한 결과 기둥은 참나무와 상수리나무로 밝혀졌다. 주거지 터는 모양에 따라 그 크기도 다양한데 정사각형의 집은 대체로 5-6평 크기라고 한다. 발굴된 흔적을 토대로 정사각형의 집을 복원해 보았다. 먼저 땅을 파고 네 개의 참나무 기둥을 세운 후 다시 여러 개의 보조기둥을 세운다. 그리고 이렇게 짚단 혹은 갈대를 엮어 지붕과 벽을 삼았을 것이다.


검단리 마을에서는 기둥구멍이 6개 이상인 집터 도 많이 발견됐다. 대체로 직사각형의 모양을 하고 있는데 이렇게 6개의 주 기둥을 세웠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 직사각형의 집은 정사각형에 비해 규모가 큰 것이 특징이다.


전옥련 

인터뷰) 방형에 있어서 정방형하고 긴 장방형 직사각형 하고 정사각형 두 가지가 있는데 각각의 시기에 상호간의 공존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일단 거기에 용도상이나 시기적인 차이 이런 것보다는 그 안에 있어서 좀 더 중심적인 역할을 하는 주거지인가 아니면 거기에 부속되는 주거지인가 하는 그런 차이고 내지는 고 안에서 좀더 위치적으로 중심되는 위치와 신분이라면 이상하지만은 그것보다 좀더 떨어지는 위치로 볼 수 있겠죠.

 


크고 작은 사각형 집들이 밀집해 있는 주거지 터에서 특이한 형태의 집터가 눈에 띄었다. 바로 원형 집 자리다. 두 개의 기둥으로 간단하게 지은 이 원형의 집은 직사각형이나 정사각형의 집보다는 앞선 형태로 추정되고 있다. 지금으로부터 2600년 전, 울주 검단리에는 청동기 시대 마을이 있었다. 신분의 차이에 따라 집의 규모를 달리했던 이 검단리 마을엔 모두 93가구, 약 400여명의 주민이 살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제가 지금 서있는 곳은 울주 검단리 마을입니다. 기원전 5-6세기, 그러니까 지금으로부터 2천 5.6백 년 전의 청동기시대 있었던 집입니다. 청동기시대 사람들이 살았던 집의 내부는 어떻게 생겼을까요. 참 궁금한데요. 한번 들어가 보겠습니다. 안에 들어와 보니까 집안이 이렇게 한눈에 들어옵니다. 원룸형식의 구조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그리고 또 이쪽 한켠에 보면 아주 평평한 돌이 놓여 있는데 그 옆에서 갈다만 칼이 발견된 것으로 봐서 이곳은 아마 석기를 만들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리고 이 바로 옆에는 화덕이 있군요. 이 화덕을 이용해서 음식도 하고 아마 추위도 피했을 것으로 여겨집니다. 또 이쪽을 보시죠. 당시 사용했을 그러한 토기들이 흩어져 있군요. 그리고 이 음식물을 저장해 놓은 항아리들도 눈에 보입니다. 또 이 집 주변을 둘러가면서 홈을 파 놓았는데 아마 이것은 배수로를 만들어 놓은 것 같습니다. 비가 많이 오거나 또는 물을 사용한 후에 빼기 그 물을 간편하게 밖으로 빼낼 수 있도록 그런 배수구 역할을 할 수 있도록 만들어 놓은 것 같습니다. 자, 어떠십니까 .이렇게 집 내부를 살펴보니까 청동기 시대 사람들의 생활을 어느 정도 짐작할 수 있지 않으십니까?


그런데 지금 우리가 본 것은 당시 생활의 아주 작은 단면에 불과합니다. 이 마을엔 어떤 시설이 있고 또 당시 사람들이 어떤 일을 했는지 청동기시대 마을을 좀 더 둘러보도록 하겠습니다.


고조선 사람들은 어떻게 살았을까?

 

 

진주 남강에 댐 공사가 시작되면서 수몰지구에 대한 대대적인 발굴조사가 실시됐다. 놀랍게도 그곳엔 구석기시대에서 철기시대에 이르는 거대한 유적이 있었다. 그 중의 하나인 이곳은 기원전 5세기 청동기시대 마을 터로 밝혀졌다. 그런데 이 마을엔 눈에 띄는 독특한 시설이 있다. 마을로 들어서는 입구에서 가장 먼저 만나는 것이 바로 이 도랑이다. 사람이 직접 판 것으로 보이는 이 도랑은 길이가 300미터. 마을에 들어서려면 반드시 이 도랑을 지나야 한다. 그런데 폭이 2미터에 깊이는 1.5미터로 도랑을 건너는 일이 결코 간단하지 않다. 도랑의 모양도 특이하다. 윗부분의 폭은 넓지만 밑으로 내려갈수록 좁아지는 V자 형이다.


박광렬 조사과장(경남고고학연구소)

인터뷰) 방어를 위해서 인공적으로 판 환호유적이 되겠습니다. 그렇다면 환호유적이라고 뭐냐? 외부의 적들이 쳐들어오는 것을 방어하기 위해서 깊이 판 흔적이 되겠습니다. 방어시설물이 되겠습니다.


이 도랑은 환호, 즉 적의 침략을 막기 위해 설치한 방어 시설물인 것이다. 그런데 환호 바로 옆에서 또 다른 흔적이 발견됐다. 이번엔 커다란 구멍자리였다. 원형 또는 사각형의 이 구멍들은 나무기둥을 세운 흔적으로 보인다. 마을을 빙 둘러 세워놓은 나무기둥, 그것은 목책이었다.


박광렬 조사과장

인터뷰) 환호가 1차 방어시설이라고 한다면 이 목책은 환호를 뛰어넘은 적들을 방어하는 2차 방어시설로서 이 두 개가 한꺼번에 세워짐에 따라서 강력한 방어체계가 되겠죠.

 


남강의 청동기 시대 마을은 환호와 목책, 2단계의 방어시설을 갖추고 있었다. 환호는 적이 마을로 들어오는 것을 막기 위한 1차 방어물이다. 그리고 이 환호 바로 안쪽에 높은 목책을 세웠는데 그것이 2차 방어물인 것이다. 목책은 환호를 뛰어넘은 적의 공격은 물론 돌과 화살을 막는 역할도 했을 것이다. 남강 마을의 방어시설은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마을 안쪽으로 발굴해 들어가자 중간 지점에서 깊은 구덩이들이 발견됐다. 크기와 구조가 마을 입구의 환호와 같았다. 이것 역시 또 하나의 환호인 것이다. 그런데 깊은 구덩이를 둥글게 이어놓은 이 환호는 뜻밖에도 두 줄을 이루고 있었다. 결국 이 마을은 입구에 큰 환호를 만들고 마을 중간지점에도 두 줄의 환호를 설치해 놓은 것이다. 외부의 적이 1차 방어선을 뚫는 다해도 마을 깊숙이 공격해 들어가기 위해서는 더욱 견고한 장애물을 넘어야 한다. 이렇듯 남강 마을은 2중 3중의 견고한 방어체계를 구축하고 있었다.

 


마을 안에서는 주거지 터와 함께 각종 물건을 만들었던 공장 터가 드러났다. 공장 터 중에서 큰 규모에 속하는 이 곳은 석기 제작소다. 2500년 전 청동기인들이 석기를 만들었던 이 공장 터에서 흥미로운 사실을 발견할 수 있었다.


정의도 학예실장(당시 경남 문화재 연구원) 설명

이것이 현재 남아있는 반제품입니다. 만들다 가 만거죠. 어떤 거를? 화살촉을 만들다가 만 겁니다. 여기 이 부분을 이렇게 갑니다. 갈아서 모양을 만들어 가다가 맨 마지막 단계에 오면 이것으로서 물을 좀 묻혀 가지고 최후의 공정을 합니다. 이런 형태의 돌을 갈아서 가공을 한 다음에 최종적으로는 이런 형태의 석촉을 만들게 됩니다.

 

 

이렇게 화살 하나를 만드는 과정에서도 각 단계마다 일의 분화가 이루어져 있었던 것이다.  또 공장 터에서 발굴된 유물들로 보아 각 공장마다 전문화가 이루어져 있음을 알 수 있었다. 돌칼 돌화살 등 석기를 전문으로 만들었던 석기 제작소와 함께 옥 제품만을 생산했던 옥 제작소도 있었다. 그리고 토기를 전문으로 생산하는 토기 제작소도 발견됐다.


정의도 학예실장 (경남문화재 연구원)

인터뷰) 사람들이 아마도 공간을 분할해 썼습니다. 여 기까지는 집자리, 여기서 여까지는 작업 공간, 이어서 묘역이 설치된 그런 공간을 가지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규모가 있는 마을이었나 보죠? 대단히 큰 마을입니다. 여기는 아무래도 묘지나 주거지를 통해서 보면 어떤 큰 집단 지도자가 있고 지도자 밑에 각기의 분화된 직업을 가지고 있는 그런 마을이었습니다.

 


이 청동기 마을의 전체 구조를 살펴보면 마을 입구에 옥 제작소가 있다. 마을 중간지점에 이르면 토기 제작소가 보인다. 이곳을 지나 다시 마을 안쪽으로 깊숙이 들어가면 석기 제작소를 만날 수 있다. 분화된 작업공간과 함께 철저한 방어시설을 갖춘 남강 마을, 이것이 2500년 전 청동기 마을의 모습이다.


이곳은 진주 남강 지역에 있었던 청동기 시대 마을입니다. 환호와 목책으로 튼튼하게 방어시설을 해 놓았는데요. 이렇게 방어시설을 갖춘 것은 외부로부터의 침입에 대비한 것입니다. 이정도 방어시설을 갖출 정도라면 이 마을이 외부로부터의 공격 즉 전쟁이 있었다는 사실을 엿볼 수 있게 해줍니다. 그리고 이 마을이 공격을 당했다는 것은 그만큼 지켜야 할 재산이 많았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자 이 마을을 부유하게 만든 그 원천이 무엇인지 한번 둘러보도록 하겠습니다. (주변 둘러보고, 반월형 석도 발견) 저기에 뭔가가 있습니다. 뭔지 한번 보겠습니다. 이 반달모양에 구멍이 두 개가 뚫려있는 아주 독특한 모양의 돌입니다. 이것은 반월형 석도라고 불리는 농기구입니다. 그저 한 조각의 돌처럼 보이는 이 반월형 석도는 고조선 시대의 생활을 알려주는 중요한 단서입니다. 이런 농기구가 나왔다는 것은 이곳에서 농사를 지었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농경문화가 발달했다

 

 

 

 

국립 중앙박물관에는 흥미로운 청동기 시대 유물이 있다. 바로 이 농경문 청동기다. 손바닥만한 크기의 이 청동기 겉면에는 특이하게도 농사와 관련된 그림들이 그려져 있는데 바로 이 그림 속에 청동기시대 농경수준을 알 수 있는 단서가 있다. 농경문 청동기의 그림을 자세히 살펴보면 먼저 곡식을 항아리에 저장하는 사람의 모습, 괭이 모양의 농기구를 높이 들고 있는 사람의 모습 그리고 따비로 보이는 농기구를 사용하는 모습도 보인다. 그런데 가늘게 줄이 쳐진 이 네모난 모양은 무엇인가?

 


청동기 시대의 밭 터를 확인해 보기로 했다. 청동기 시대 유적지인 진주남강 대평리 유적에서 수만 평에 이르는 밭 유적지가 발견됐다. 그런데 이 대평리 밭 터에는 놀라운 흔적이 남아 있었다. 폭 30센티미터의 고랑과 50센티미터의 두둑, 즉 밭이랑의 흔적이었다.


청동기 시대, 대평리 사람들이 어떻게 밭농사를 지었는지 알아보기 위해 발굴에 참여했던 경남대 박물관 팀을 찾았다. 대평리 밭 터에 있는 이랑의 흔적은 당시 밭농사의 수준이 꽤 높았음을 보여주고 있다.


이상길 교수 경남대 인문학부

인터뷰) 작물을 재배하게 되면 잡초가 엄청나게 자라나게 되는데 그걸 규칙적으로 잡초 제거를 하지 않으면 지력을 모두 잡초한테 뺏기기 때문에 작물이 계속성장 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아마 이 고랑을 따로 만들어서 효율적으로 잡초를 제거한다거나 잡초의 성장을 억제하는 그런 효과도 있을 것 같고 역시 작물을 열을 지어서 쭉 재배를 하기 때문에 기본적인 관리라든지 나중에는 수확이라든지 그런데도 훨씬 효율적이지 않을까 그렇게 생각합니다.

 

 

대평리에서는 수백 점의 경작용 석기가 출토됐는데 그 중에 반월형 석도가 있었다. 반월형 석도 3 청동기 시대에 등장하는 특징적인 농기구로 주로 이삭을 따는데 사용됐다고 한다.


이상길 교수

설명) 여기다 끈을 끼워가지고 여기 자세히 보시면 여기 마모가 이렇게 돼 있고 여기에는 이렇게 마모가 돼 있어요. 여기 닳아있죠. 그러니까 끈을 이렇게 끼고 요쪽으로 넣어서 끈을 손가락으로 껴서 잡고, 곡식의 이삭줄기만 따는 거죠.


반월형 석도는 이렇게 두 개의 구멍에 끈을 끼워 동그란 고리를 만든 후 ,그 고리에 엄지손가락을 넣고 사용했던 것이다. 청동기 시대 사람들은 어떤 작물을 재배했을까? 대평리에서는 많은 종류의 탄화된 곡식알갱이들이 출토됐는데 보리와 밀. 현재 확인된 곡식으로는 보리와 밀 기장과 조 등 10여 가지가 넘는다. 그 중에서 눈에 띄는 곡식이 있는데 바로 이 쌀

이다. 하지만 이것이 밭벼인지 아니면 논농사의 흔적인지는 아직 밝혀지지 않았다.

 

 

청동기 시대에 논농사가 이루어졌는지 그 유적을 찾아보기로 했다. 현재 아파트 단지가 건설되고 있는 울산 무거동, 지하 130미터 지점에서 2600년 전 청동기시대의 논 유적이 발굴됐다. 토양 분석결과 벼의 꽃가루와 함께 피의 꽃가루, 그리고 진딧물의 유충도 확인됐다. 논자리가 분명했다.


이상길 교수

인터뷰) 자연과학적인 분석방법으로 논흙에 남아있는 벼의 화분 꽃가루가 나와 있습니다. 그것을 플란토팔 분석이라고 하는 그런 방법을 쓰게 되면 그런 꽃가루를 추출할 수가 있는데 이 저희들이 조사했던 논흙에서 상당히 많은 양이 나왔습니다. 그 외에도 논바닥에서 경작도구의 흔적이라든지 사람 발자국 같은 거라든지 그런 여러 가지 것들이 있었기 때문에 그 부분을 논이라고 하는 데는 이의가 없을 것으로 생각이 됩니다.

 

 

논의 형태는 일정하지 않으나 대체로 직사각형을 이루고 논둑이 존재했다. 그리고 논에 물을 댄 흔적이 보이는데 논둑의 중간에는 물이 흐르도록 이렇게 수로를 터놓았다.


이상길 교수

인터뷰) 그 농사의 수준은 거의 상당한 정도에 이르렀다고 생각을 합니다. 그리고 기우에 대한 문제라든지 아니면 물의 조절이라든지 이런 걸 다 고려하게 되는 거죠. 그리고 역시 아마 농사에서 나온 역시 곡물들을 토기에서 저장을 한다든지 어떤 화덕시설을 만들어서 조리를 한다든지 이런 흔적들도 다 나타나고 있기 때문에 그런 환경의 문제도 포함해서 조리에 이르기까지 전체적인 것이 지금의 어떤 농촌과 비교해서도 전혀 손색이 없을 정도로 봐도 좋을 것 같습니다.


기원전 5-6세기, 고조선 시대의 농경은 이미 수준 높은 단계에 올라 있었다. 당시 사람들은 밭이랑을 만들어 잡초를 제거하고 농사에 필요한 도구를 개발하여 생산력을 높였다. 그리고 당시로서는 최첨단 산업인 논농사도 이루어졌던 것이다.


고조선 사람들은 수준 높은 농경문화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물론 일일이 손으로 농사를 지었지만 ,논에 물을 대고 밭에 이랑을 낸 것은 물론 지금 우리가 먹는 쌀이나 조 수수 같은 곡물을 그들도 재배해 먹었습니다. 그리고 고조선 사람들이 사용했던 농기구도 낫이나 괭이같이 지금까지 널리 쓰이고 있는 바로 그 농기구들의 원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자, 아주 먼 상상의 나라처럼 여겨지던 고조선 사람들이 삶이 점점 손에 잡히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한 가지 의문이 생깁니다. 농사를 짓는다는 것은 돌로 석기를 만드는 것처럼 그렇게 간단한 일이 아닙니다. 여러분도 잘 아시다시피 농사를 지으려면 무엇보다 절기를 알아야 합니다. 언제 기온이 올라가고 비가 오는지 알아야 씨를 뿌리고 곡식을 거둘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절기를 안다는 것은 바로 하늘을 안다는 것인데요. 그렇다면, 과연 고조선 사람들은 천문관측을 했을까요?



고조선은 천문관측을 했다


창원 덕천리. 지금은 군부대 병참기지가 들어선 이곳에는 청동기 시대의 유적이 있다. 바로 이 고인돌1)이다. 덮개 돌의 무개만 해도 35톤에 이르는 이 거대 한 고인돌은 독특한 구조를 가지고 있다고 한다. 땅 밑으로는 모두 네 개의 단을 파고 맨 아래에 무덤방을 놓았다. 시신이 있는 무덤방을 덮은 후 차례로 돌을 채우고 마지막으로 덮개돌을 얹는다. 지금까지 발견된 고인돌과는 전혀 다른 형식이었다. 구조뿐만이 아니라 이 고인돌 유적에는 또 다른 독특한 흔적이 있는데. 바로 석축의 흔적이다. 이 석축은 고인돌의 외곽을 둘러싸고 있는데 현재 발견된 길이는 남북 56미터, 동서 17미터에 이른다.

 


원래의 형태는 고인돌을 중심으로 석축을 쌓고 그 외곽엔 넓은도랑을 파 놓았다. 이것은 거대한 묘역이자 제단이었을 것이다. 그런데 이 유적에서 주목할 점이 있다. 고인돌을 둘러싸고 있는 석축의 한 변을 측정한 결과 정남향을 향하고 있다는 사실이 밝혀진 것이다.


이용복 교수 서울교대 천문학

인터뷰) 밤에는 물론 북극성을 잡아서 북쪽방향을 잡았겠지만 낮에는 정확하게 해의 태양의 운행을 가지고 잡았습니다. 뭐 간단한 예로 우리가 땅 바닥에 원을 그려 놓고 가운데에 나무를 세워 놓은 다음에 나무 끝이 향하는 그림자를 쭉 찍어나가다 보면은 원과 만나는 두 지점이 나옵니다. 그 두 지점을 수평이등분 했을 때 가리키는 방향이 정확한 북쪽입니다. 이건 동서를 막론하고 아주 고대부터 알려졌던 사실입니다

 

 

청동기 시대에 천체관측이 이루어졌다면 분명히 그 흔적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충북대 박물관팀은 지난 1978년 대청댐 수몰지역에서 청동기 시대의 고인돌 유적을 발굴했다. 그런데 이곳에서 특이한 판자돌이 출토됐다. 이것이 가호리 유적에서 출토된 바로 그 판자돌이다. 돌 표면에는 작은 구멍들이 나있는데 사람이 인공적으로 만든 흔적으로 보인다.


이 구멍들이 과연 무엇을 의미하는지 아직 정확하게 밝혀지지 않고 있지만, 이것이 별자리 일지도 모른다는 조심스런 추측이 제기되고 있다.


이융조 교수 충북대 고고미술사학과

인터뷰) 이 면과 둘레는 손질이 된 것이 분명합니다. 그런데 거기에서 나타나는 판판한 면에 굼 구멍보다는 굼인데 이 굼이 우리 쪽으로 관찰이 되고 배열이 돼 있으니까 이것은 여러 가지로 인위적인 배열이라고 한다면 그 가능성이 별자리일 가능성을 제시를 했었죠.


이것이 과연 별자리인지 천문학자의 자문을 구했다. 이용복 교수가 판자돌에 있는 구멍을 연결하자 별자리가 그려졌다. 그것은 바로 북두칠성이었다. 그런데 더욱 놀라운 사실은 이 고인돌 위에 그려진 북두칠성이 실제 별자리와 그 모양은 물론 별과 별 사이의 간격까지 정확히 일치하고 있는 것이다.


이용복 교수

인터뷰) 우리가 봤을 때 실제 북쪽에 나타난 별을 반대로 우리가 거울을 비췄을 때 모습이 대칭적으로 나타나죠. 그렇게 표시된 것이 지금 현재 대략 찾아본 북두칠성인데 이런 모습의 별자리가 특히 북한 지역에서 평양에서 발견됐다는 그 고인돌에도 그 고인돌 표면에도 이게 나타난 것이 있습니다.

 


청동기시대의 별자리는 암각화에서도 찾아 볼 수 있다. 경북 신흥리 마을 뒷산에 서 있는 오줌바위. 암각화 전문가인 이하우 선생은 이 바위의 한쪽 귀퉁이에서 별자리 모양을 발견했다. 이것은 카시오페아와 같은 모양이었다. 그런데 이 오줌 바위에는 카시오페아 외에도 여러 개의 다른 별자리가 그려져 있었다. 


이하우 암각화 전문가

설명) 이 꼭지점과 꼭지점을 이어서 똑바로 나가버릴 것 같으면은 어느 지점에는 북극성이 나타나게 돼 있죠. 그래서 찾아낸 바위구멍이 이 구멍입니다. 이것을 북극성으로 생각할 수 있어요. 중간에 바위구멍이 있고 둘레는 동심원을 하나 새겨놨죠.


북극성의 맞은편엔 익숙한 모양의 그림이 있었다.

 

 

이하우 암각화 전문가

설명) 카시오페아의 대척점에서 찾아낸 윷판 형상이 이거와 같습니다. 그랬을 때 이것을 북극성을 일주천하는 북두칠성의 별자리로 볼 수 있겠다는 거죠. 

 

 

고대의 유적에서 나타나는 윷판의 모양에는 여러 가지 설이 있지만 이하우 선생은 이 윷판이 북극성을 중심으로 돌아가는 북두칠성의 운행을 표현한 것으로 주장하고 있다. 결국 이 윷판은 북두칠성을 상징하는 그림이라는 것이다. 이하우 선생은 오줌바위의 한쪽 끝에서 또 다른 별자리를 찾아냈다. 이것은 전갈자리라고 했다. 이것은 암반을 탁본한 것이다. 이것을 실제의 전갈자리와 비교해 보았다. 모양이 거의 일치했다.


이하우 암각화 연구가

인터뷰) 선사사회에서 농경과 관계있지 않을까. 여름철은 파종한 이후 곡물이 성장하는 시기입니다. 이 성장하는 시기에만 전갈자리가 보인다는 것이죠. 그랬을 때에는 이 별자리를 새긴 선사인들의 마음속에는 농경에 대한 기준점 그리고 많은 수확을 기대하고자 하는 마음과 좀 더 과학영농을 할 때 별자를 이용했다는 증거물로서 전갈자리를 제시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신흥리 오줌바위에는 여름 별자리인 전갈자리를 비롯해 북극성을 중심으로 대칭점에 서있는 카시오페아와 북두칠성도 정확히 표시되어 있다 .이것은 청동기 시대 사람들이 별자리를 관측했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평안남도 용덕리에서 출토된 고인돌에도 북극성을 기준으로 11개의 별자리가 그려져 있다. 이미 기원전 10세기에 천문관측이 이루어졌던 것이다 .


평양 용덕리에서 발굴된 고인돌의 덮개돌에 이런 별자리가 새겨져 있었습니다. 그뿐만이 아니라 별자리의 모양이나 물론 별의 광도에 따라서 크기까지 다르게 표시해 놓았습니다. 마치 요즘의 별자리를 보는 듯이 아주 상세하게 그려놓았습니다. 이렇게 고조선 사람들이 천문관측을 했다는 것은 참으로 대단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 고조선시대 사람들은 국가에 중요한 일을 수행하기 전에는 이 천체관측을 하는 것이 아주 필수적이었습니다. 또 고조선시대 사람들은 절기를 파악해서 농사를 지었습니다. 그래서 그해 풍년이 들지 흉년이 들지를 알 수 있었고 방향까지도 아주 정확하게 계산을 할 수가 있었습니다. 자 이런 일을 모두가 천체관측을 할 수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습니다. 자, 지금까지 우리들은 고조선 사람들이 어떤 집에서 살았고 무엇을 먹고 살았는지 살펴보았습니다. 이제 고조선 사람들은 어떤 옷을 입고 살았는지 알아보겠습니다.



고조선은 모직물 수출국가였다


압록강 북쪽에 있는 중국 길림성 성성초, 이곳에서 기원전 8세기경의 고조선 유적이 발견됐다. 


중국인 

설명) 원래는 석관묘였다. 이전에는 여기가 물에 잠겨 있었는데 물이 빠지면서 무덤이 드러났다. 언제 발견했나? 1971년도에 발견했다.


2800년 전의 이 고조선 무덤에서는 비파형 동검과 함께 아주 희귀한 유물이 출토됐는데 바로 고조선 시대의 천 조각이었다. 당시 중국학자들의 분석에 의하면 이것은 개털과 양털을 섞어서 짠 모직물이었다. 전문가들은 고조선 시대에 이미 다양한 섬유의 생산이 이루어졌다고 보고 있다. 


박선희 교수

인터뷰) 고조선 사람들은 복식의 재료로서 가죽이나 모직물 또는 마직물 그 다음에 비단이라고 일반적으로 말씀합니다만은 비단은 중국에서부터 온 섬유고 저희도 중국과 같은 서기전 2700년경부터 누에를 키우고 실크섬유를 생산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중국의 비단이라든가 견섬유와 다른 고조선만이 갖는 고유한 실크 성유들을 다양하게 생산했습니다.

 

 

고조선의 유물 중에는 가락바퀴 즉 실을 감는 기구인 ,방추차가 광범위하게 분포한다. 이를 통해 고조선의 직물기술이 발달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고구려 대안리 고분벽화에는 베틀이 그려져 있는데 경사가 완만한 이 베틀은 고조선의 베틀을 계승한 것이다. 이것은 같은 시기에 사용한 중국의 베틀이다. 고조선의 것과를 달리 베틀의 경사가 가파르다. 


박선희 교수

인터뷰) 고대 중국과 고대 한국의 직기 구조상의 차이는 고대 한민족들이 오랫동안 고유한 직기로서 직물을 생산했음을 의미해주고 있습니다. 그 결과 고조선 시대의 직물과 당시대의 중국에서 출토된 직물들을 비교 분석한 결과 고조선에서 생산한 모직물이나 또는 면직물 마직물 또는 비던 섬유 등이 훨씬 현대 섬유에 가깝고......

 


직물기술이 발달했던 고조선의 의상은 어떠했는지 알기 위해 박선희 교수의 자문을 구했다. 고구려 벽화고분인 안악 3호 분에는 고조선의 의상을 계승한 복식이 잘 나타나있다. 특히 웃옷에 맨 옷고름과 왼쪽 여밈은 고조선시대부터 시작된 우리 의상의 특징이다. 고조선의 유물과 자료를 통해 당시의 의상을 복원해 보았다. 겉옷에 따라 두루마기 또는 저고리와 바지로 구분되는데 주로 한가지색의 단정한 형태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박선희 교수

인터뷰) 중국옷은 겉옷만이 크게 강조되는 그러한 분위기를 갖습니다만 우리 옷은 겉 옷 속에 겉옷보다 옅은 색의 속옷을 단정히 입어서 단아한 느낌을 주고 또 앞 여밈새에 옷고름을 달기도 해서 더욱 더 우아한 처리방식을 갖습니다.

 


중국의 역사서인 관자에는 고조선에 관한 기록이 나오는데 이것은 일찍이 직물기술이 발달한 고조선이 표범 가죽과 모직물을 중국에 수출했다는 사실을 알려주고 있다.


고조선이 수출국가였다면 그만큼 경제적으로도 넉넉했을 것이다. 중국 대련시에는 수출국 고조선의 면모를 파악할 수 있는 유적이 있다. 대련시 여순박물관에는 기원전 7-8세기 고조선유적으로 밝혀진 강상무덤의 유물들이 소장돼 있다.

 


무덤에서 한꺼번에 150명의 인골이 발굴되면서 순장무덤이라는 주장도 있지만 아직 정확한 성격은 밝혀지고 있지 않다. 단지 무덤의 주인이 이 지역의 세력가였음을 짐작할 수 있다. 그런데 강상무덤의 유물에서 중국 전한시대의 화폐인 오수전이 출토됐다. 그리고 인근지역에서는 중국 연나라 시대의 화폐인 명도전도 출토됐다. 왜 이곳에서 중국화폐가 나오는 것일까?


중국의 역사서 사기2)는 고조선이 중계무역을 통해 이익을 취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전해준다.


윤내현 교수 단국대

인터뷰) 당시의 중국화폐 명도전이라고 하는 중국화폐가 지금 북한지역하고 뭐 만주지역 그러니까 고조선의 영토내에서 굉장히 많이 출토되고 있습니다. 한 유적에서 많이 나온 것은 5천점, 4천점, 3천점, 이렇게 출토되고 있고 1-3백점 출토되는 곳은 여러 곳이 있습니다. 이런 걸로 봐서 고조선이 중국에 굉장히 많은 양의 물건을 수출했고 외화를 많이 획득했던 아주 외화 보유국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고조선은 중계무역으로 막대한 이익을 취하는 것은 물론 특산물의 수출을 통해 외화를 획득했다. 대외교류를 통한 부의 축적, 이것은 고조선이 강국으로 커나가는 든든한 기반이 된다. 


고조선은 수출국가였습니다. 대표적인 수출품으로는 모직물과 화살 화살촉 등의 무기류였다고 합니다. 고조선의 유적에서 출토되는 수많은 중국화폐들이 고조선이 수출국가였다는 것을 뒷받침해주고 있습니다. 자, 이 고조선이 수출을 했다는 것은 당시 고조선 사람들이 쓰고 남은 물건이 많았다는 얘긴데요. 이 고조선은 국내적으로는 농경과 방직기술이 무척 발달해 있었고, 국제적으로는 수출을 통해 중국으로부터 필요한 물건을 구입하거나 외화를 벌어들였습니다. 이렇게 부를 축적한 고조선은 국가 체제도 보다 강력해 졌을 것이고 국제적인 지위도 높아졌을 것입니다. 자, 그렇다면 당시 고조선은 이 동북아시아에서 어떤 위치를 차지하고 있었을까요?



고조선은 우두머리 국가였다


오랜 세월이 지나는 동안 고조선은 많은 변화를 겪었을 것이다. 그 한지점인 전성기에 고조선은 동북아시아의 강자로 떠오르고 있었다. 기록에 의하면 고조선의 영토에는 수많은 거수(渠帥)가 있었다고 하는데 이것은 고조선의 세력권을 알려준다.


윤내현 교수

인터뷰) 고조선이 건국되는 과정에서 여러 지역의 마을 연맹이 거기에 들어오게 됩니다. 근데 그 당시에는 오늘날처럼 중앙집권적인 행정조직이나 행정체계가 마련이 안 되어 있었으니까 그전에 있었던 각 지역의 마을 연맹체를 그대로 인정합니다. 그 마을 연맹체엔 추장들이 있었거든요. 그걸 인정을 하면서 중앙에 단군이라고 하는 최고 통치자가 그들을 거느리는 거죠. 그들에게 어떤 의무를 이행하게 하고 그래서 이 마을 연맹체들을 그대로 지역에 하나의 정치권력으로 인정을 해요. 이것이 거수국인거죠. 그리고 그전에 추장이었던 사람이 바로 그 지역의 권력자로 거수라고 불려지게 된 겁니다.


고조선의 거수국에는 고구려도 포함되어 있었다. 고구려의 수도 중국 집안에는 고조선과 고구려의 관계를 알려주는 기록이 있다. 바로 이 광개토대왕릉비다. 광개토대왕릉비문에는 고구려의 시조 추모왕의 출생이 적혀 있는데 추모왕은 천제와 하백의 딸 사이에서 태어난 자손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삼국유사에 의하면 하백의 딸의 남편이 단군으로 기록되어 있다 결국 추모왕은 단군의 자손 즉 고구려는 고조선을 계승한 것이다.


고조선의 전성기 그 중심지는 어디였는지 기록을 찾아보았다. 하지만 기록 속에서 발견할 수 있는 것은 왕검성이라는 이름뿐이었다. 현재 북한의 학자들은 고조선의 수도 왕검성이 단군릉이 있는 평양지역에 있었다고 주장하고 있다. 또한 대동강 남쪽에서 낙랑유적이 출토된 것으로 보아 왕검성이 이곳에 있었을 것이라는 추측도 있다. 그러나 고구려의 수도, 왕검성이 어디인지는 아직 밝혀지지 않고 있다.


서영수 교수

인터뷰) 전국 칠웅 중의 하나인 연나라와 서로 각축을 할 정도니까 그때의 고조선은 매우 큰 나라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런 큰 나라가 있다가 BC 4세기 말에서 BC 3세기 초엽이 큰 전쟁이 일어났어요. 전국 연나라와 싸워가지고 그때 고조선의 중심을 대동강 쪽으로 후퇴한 것으로 보입니다.

 

 

기원전 5세기 말 중국은 전국 7웅이 각축을 벌이는 전국시대로 돌입한다. 그 중 하나인 연나라의 침략으로 고조선은 중심지를 대동강으로 옮긴다. 그러나 그후 세력을 회복한 고조선은 연나라를 공격하여 그 동쪽 땅을 빼앗는다. 중국의 혼란기를 틈타 세력을 확장한 것이다. 기원전 206년 진나라를 멸망시키고 한나라가 중국의 통일왕조로 들어선다. 당시 한나라를 위협했던 최대의 적은 북쪽의 흉노와 동쪽의 고조선이었다.


송호정 교수 한국 교원대 역사교육학과

인터뷰) 당시 문헌사를 보면 고조선는 위만 조선이었는데 국가체제를 수립을 하고 중국황제에게 조공을 받친다든지 이런 것들을 이행을 하지 않고 또 남쪽 주변지역에 오랑캐 국가들이 중국에 조공을 받치거나 무역을 하는 것들을 중간에서 차단을 하고 중계무역을 하는 이런 행위를 하죠. 그 다음에 흉노족과 연결을 해 가지고 세력을 키우려고 한다고 하는 그런 기록들이 보입니다. 이러한 것에 대해서 중국 중심에 세계 질서를 구축하려고 하는 목적에서 결국에는 고조선에 대해서 침공을 하는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중국의 사기에는 고조선과 한나라의 전쟁이 상세하게 기록되어 있다. 기원전 108년 한나라는 육군 5만 해군 7천의 병력을 동원, 고조선을 공격한다. 당시 한나라는 육로와 해로를 이용해 양면작전을 펼친다. 한나라 누선장군 왕복은 7천명의 수군을 이끌고 산동반도를 출발한다, 그러나 의기양양하던 한나라 수군은 고조선의 기습공격에 궤멸되고 만다. 또한 5만의 한나라 대군은 고구려 수도 왕검성을 포위했으나 1년이 넘도록 함락시키지 못한 채 성 주위를 맴돌아야 했다. 이렇게 막강했던 고조선이 멸망한 이유는 다름 아닌 내부분열이었다. 기록에 의하면 기원전 108년 니계상 참이 왕을 죽이고 한나라에 항복한다.3)


서영수 교수

인터뷰) 동북아시아의 패자로 등장하면서 영역을 확대하려 했기 때문에 그 확대된 영역을 완전히 국가의 체제에 넣지 못했던 것이다. 그렇게 돼서 한 가지 멸망요인이 생겼던 것이죠. 두 번째는 위만조선시대에는 서북한 지역에만 국가가 형성된 것이 아니라 한강유역의 진국 동쪽의 고구려 부여등 여러 세력이 흥기했던 상황입니다. 이런 세력의 각축이 벌어져서 그런 각축 과정 속에서 위만조선이 멸망했죠.


오랜 세월 고대국가의 기틀을 잡고 동북아시아의 강자로 떠오른 고조선, 고조선은 그렇게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지금까지도 고조선이 우리역사에서 어떻게 사라졌는지에 대해서 잘 알려져 있지 않습니다. 그래서 더욱 고조선이 신화 속의 국가처럼 느껴졌는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고조선은 중국 한나라의 5만7천에 이르는 대군의 공격을 받고도 무려 1년을 버틸 정도로 강력한 국가였습니다. 그러나 결국 내부분열로 무너집니다. 고조선 멸망 후 고조선의 땅에서 일어난 고구려와 신라, 부여는 모두 단군의 후손을 자처하며 고조선을 계승해 나갔습니다. 이 고조선이 멸망하고 나서도 우리역사는 단절되지 않고 이어졌던 것입니다. 자, 여기 고조선이 있습니다. 비파형 동검을 사용했던 그들은 넓은 세력권을 형성하고 있었고, 그 세력권을 법으로 통제할 만큼 공권력이 성숙한 나라였습니다. 수준 높은 농경문화도 가지고 있었고 함께 작업의 분화도 이루어졌습니다. 모직물 수출국가로서 부를 축적한 고조선은 점차 세력을 확장하여 동북아시아의 강국으로 떠올랐던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고조선에 한발 가까이 다가갔습니다. 하지만 고조선에 대해서 풀어야 할 비밀은 아직도 많이 남아 있습니다. 이 고조선의 비밀을 풀어내는 일, 그것은 우리 역사의 빈장을 채우는 것이자, 우리 역사의 뿌리를 찾는 일입니다.


※ 저작권은 KBS <역사스페셜>에 있습니다. 상업적인 용도로 사용을 금합니다.


1) 창원 덕천리 고인돌

   

   이곳에서는 고인돌은 외형적으로 모두 6기가 확인되었으나, 발굴조사 결과 3기의 하부에서만 매장시설이 확인되었다. 고인돌은 대체로 남북축선상에 일렬로 배치되어 있다. 매장유구가 확인된 3기의 고인돌은 덮개돌이나 묘광의 규모에 있어 차이가 있기는 하나, 단이 지게 묘광을 파고 그 아래에 석곽형의 유구를 축조한 점이 공통된다. 이들 고인돌은 개석을 1겹 이상 덮고 개석과 개석사이 또는 개석 윗부분은 적석을 하고 있으며, 외형상 원형의 봉토처럼 보이는 적색-황색토가 덮여 있다. 이 유적은 이제까지 일반적으로 인식되어 온 고인돌과는 여러 가지 점에서 상당한 차이가 있어, 일반적인 고인돌에 대한 개념과 특히 청동기시대 사회체제에 대한 개념에 있어 획기적인 인식의 전환을 가져온 유적이라는 점에서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첫째, 이 유적에서는 분묘공간과 생활공간을 의식적으로 따로 마련하였던 것으로 보이며, 삶과 죽음에 대한 공간 분할이 이루어진 것으로 보인다. 둘째, 고인돌은 하부구조가 확인된 일반적인 고인돌과는 많은 구조적 차이가 있다. 즉 덮개돌에 비해 묘광을 매우 크게 파서 아래로 단을 지웠으며, 개석을 1겹이상 중첩되게 하거나 개석과 개석사이에 수백개의 돌로써 적석한점, 구지표면에서부터 적색-황색토를 둥글게 쌓아 올려 외형상 봉토처럼 보이게 하고 그 위에 덮개돌을 얹거나 또는 적색-황색토로써 봉토처럼 둥글게 만들고 난 후 묘광을 파 내려간 점등은 그 유례를 찾기 어려운 독특한 구조를 하고 있다. 이러한 구조에 있어서의 특징은 고인돌의 축조가 단지 거대한 덮개돌의 이동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크고 깊은 묘광을 파고 수십매의 개석을 다듬어 옮기거나 그러한 개석을 깊은 묘광안에 정연하게 쌓는 등의 기술적인 문제에 대한 재검토를 요구한다. 셋째, 1호 고인돌의 경우 우선 무덤 자체가 다른 분묘에 비하여 클 뿐만 아니라 묘역도 56×17.65m에 달해 전체 분포의 1/3가량을 이 무덤이 차지하고 있다. 이러한 무덤의 크기와 묘역은 피장자의 사회적 신분 차이를 반영하는 것으로 생각된다. 넷째, 고인돌에 사용된 석재들 특히 석축에 사용된 석재들은 당시의 석재가공 기술이 일반적으로 인식되어온 것보다는 고도의 기술을 보이는 것으로, 전문성을 띤 기술집단의 존재를 상정할 수 있다. 다섯째, 1호 고인돌 주변을 둘러싸고 있는 석축 내부에서 다량의 무문토기와 함께 석착, 숫돌들이 나타나고 있는 점으로 보아 의례행위의 증거로 볼 수 있으며, 특히 유물들이 석축의 모서리를 중심으로 집중적으로 분포하고 있는 점등은 매장과 관련된 의례행위가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고인돌에 대해 더 알고 싶다면 http://cafe.daum.net/hanfuture/5eze/263 에 들어가 보시라. 자세히 설명되어 있다.



2) 조선의 우거왕이 전국과 한이 교류하는 것을 가로막았다.

3) 史記에 기록되어 있다.

by 용파더 | 2009/09/09 08:27 | 상고시대(펌) | 트랙백 | 덧글(0)

간도는 우리땅 증거 찿았다

*다음카페-상촌 김자수 선생 기념사업회  글쓴이: 금소영당/김현숙  

                                                                 http://cafe.daum.net/hskk2005-5/VVl/1706

var articleno = "17046192";

‘간도는 우리땅’ 증거 찾았다



18세기 이후 조선과 청의 국경을 나타내는 인공울타리(흙무더기나 돌무더기)의 흔적이 위성영상을 통해 백두산 천지 동남쪽에서 처음으로 확인됐다. 경향신문 뉴스메이커 간도특별기획취재팀은 최근 1m급 위성영상(2004년 6월12일 촬영)을 입수, 고지도 등을 참고해 양국간 경계를 추적한 결과 이같은 사실을 발견했다.


위상영상 전문 판독기업인 위아(주)는 “19세기말 등의 고지도와 비교한 결과 압록강과 송화강의 상류를 연결하는 토퇴와 석퇴 등 인공물의 윤곽이 1.5㎞ 이상 연결돼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고 설명했다.

이로써 그동안 중국측이 주장해온 압록강~두만강 국경 주장은 허위임이 드러났으며 1712년 백두산 정계비 건립 이후 계속된 300년간의 국경논란도 우리 측 주장이 설득력을 갖게 됐다.

특히 송화강의 지류인 토문강과 동쪽의 압록강 사이를 잇는 울타리가 양국간 국경선임이 밝혀짐에 따라 현재 연변조선족자치주에 속하는 간도 지역이 한국땅임도 입증된 셈이다.

인공울타리 흔적은 백두산 장군봉에서 내려오는 길을 따라 남쪽으로 향하다 꺾어져, 토문강의 마른 하천을 끼면서 동쪽으로 800m가량 이어지고 있다. 이후 600m 정도 불분명해진 선은 다시 300m가량 나타난다.

위성영상 판독 전문가인 이승연씨는 “지난해 중국 지안의 환도산성과 발해 상경 성곽을 위성영상을 통해 판독할 때에도 이런 띠가 나타났다”며 “영상 속에서는 작은 길처럼 보이지만 윤곽의 형태가 돌무더기 띠일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고 밝혔다.

울타리 흔적이 나타난 토문강은 위성영상에서 두만강이 아닌 송화강으로 흘러들어간다.

이씨는 “전체 지리를 살펴볼 수 있는 15m급 위성영상에서 토문강이 송화강으로 흘러들어감을 확인했다”고 말했다.

간도문제 전문가인 노계현 전 창원대 총장(외교사)은 “정계비 건립 당시 양쪽의 강 물줄기를 경계로 했다는 역사적 기록이 있는 만큼 조선과 청의 국경이 압록강과 송화강이었음을 보여주는 이번 위성영상 판독결과는 역사적 사실과도 부합한다”고 밝혔다.

조선후기 국경사를 연구해온 경인교대 강석화 교수(사학)는 “위성영상을 직접 확인해보니 토문강과 압록강 사이를 돌무더기로 연결했다는 18, 19세기 당시 사서의 내용이 사실임이 드러났다”면서 “이번 확인이 앞으로 학계에 큰 파장을 불러일으킬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윤호우기자 hou@kyunghyang.com

by 용파더 | 2009/09/08 13:18 | 조선시대(펌) | 트랙백 | 덧글(0)

고구려 -조의선인

조의선인(早衣仙人)이란 '검은 빛깔의 조복(早<검은 비단 조, 검을 조, 사실은 白밑에 十또는 七임>服) 을 입은 선인'이란 뜻으로 선배 또는 선비라 불렀다. 선배는 고구려의 10월 제사에 모인 군중 앞에서 무예를 선보인 데서 비롯되었고 선인(先人 또는 仙人)은 선배의 이두(吏讀)식 표기이다.

사냥과 가무, 무예 등의 여러 경기에서 승리한 사람을 선배라 불렀고 이들은 국가에서 급료를 받아 생활하면서 무예와 학문을 갈고 닦았다. 전시에는 이들이 자체부대를 조직하고 전장에 나가 정예군으로 활동했다. 선배는 머리를 박박 깍고 검은 옷을 입었으므로 전형적인 무사를 연상시킨다. 선배는 화랑보다도 훨씬 오래되었다.

화랑은 원화(源花)라는 여성에서 비롯되어 나중에 좋은 가문의 청년 중에 덕행 있는 자를 곱게 치장하여 화랑으로 만든 것에서 보듯이 외모와 몸치장을 중시하여 여성적인 반면 선배는 매우 남성적이다. 선배의 독특한 외양 때문에 고구려와 전쟁을 하였던 수, 당의 병사들은 이들을 승군(僧軍)으로 착각하기도 했다.

그래서 고구려를 숭상(崇尙)한 고려의 최영 장군조차 '당이 30만 대군으로 고구려를 침략하나 고구려는 승군(僧軍) 3만을 내어 이를 대파하였다.' 라고 선배를 찬양하였다. <고려도경(高麗圖經)- 원명은 《선화봉사고려도경(宣和奉使高麗圖經)》송(宋)나라 휘종(徽宗)이 고려에 국신사(國信使)를 보낼 때 수행한 서긍(徐兢)이 송도에서 보고들은 것을 그림을 곁들여서 기록한 책>에 나오는 재가화상(在家和尙)은 선배의 후예로 알려져 있다.

조의선인의 눈부신 활약이 기록으로 보이는 것이 안시성 전투였다. 당태종의 당군(唐軍)은 요동의 여러 성들을 차례로 함락시키고 많은 공성기구(攻城機具)를 사용해 안시성을 맹렬히 공격했지만 고구려군의 완강한 저항으로 실패했다.

그래서 당태종은 60일 동안 50만을 동원하여 성을 내려다보고 공격하기 위해 성의 동남쪽에 높은 토산을 쌓게 했는데 토산이 무너져 안시성 성벽을 치는 바람에 성벽 일부가 붕괴되어 매우 위태로운 상황이 되었다. 이때 고구려군 결사대가 일제히 돌격하여 당군을 물리치고 토산을 점령해 버리고 주변을 깎아 나무를 쌓아 불을 놓고 지키니 얼씬도 못했다고 한다.

기록은 이 장면을 '이때 성안에서 검은 옷을 입은 백 명의 용사가 뛰어나와 천장의 거미줄을 걷어내듯 당나라 2만 기병을 산 아래로 팽개치고는 오히려 토산을 차지해 버렸다' 라고 적고 있다. 이 검은 옷의 용사(勇士)들을 조의선인이라 부른다. 당시 고구려의 조의선인은 3만여 명에 달했고, 그 수장은 연개소문이었다고 한다..

조의선인은 선비제도라는 특별한 교육체계에 의해 양성되는 문무겸전의 인재들이다. 이들은 대체로 유년의 어린 나이에 선발되어 신체발달에 부응하는 매우 정교한 지적, 정서적, 신체적 훈련과 교양을 통하여 보다 완벽한 심신의 능력을 갖게 된다.

조의선인은 누구보다도 사물과 현상을 깊이 인식하고, 그것들이 부딪치는 문제의 실상을 정확히 파악하며, 이를 해결할 심리적, 물질적 능력을 갖도록 조련된다. 을파소나 명림답부, 을지문덕 등 역사에 이름을 남긴 이들도 모두 조의선인들이었고, 우리 문화전통에서 말하는 선비란 바로 이들이 가지고 있는 덕성과 실천력에 뿌리를 두고 있다.

고구려 제22대 안장왕(安臧王)때의 조의선인으로 선발되었던 을밀선인(乙密仙人) 문하에는 조의선도 3,000명이 다물방지가(多勿邦之歌)를 부르며 심신을 수련했다고 한다.

(다물:"되물린다"라는 뜻으로 단군조선시대의 태평성국으로 복고하겠다는 의지를 뜻함) 단군조선의 국자랑(國子郞) 혹은 천지화랑제도가 고구려에 와서는 조의선인 제도로, 백제에서는 무절(武節-일본의 사무라이(武士)로 이어짐)로 발전했으며, 신라에서는 화랑도로 이름이 바뀐 것이다.

신라의 화랑제도가 시작되기 2,500여 년 전인 단군조선 시대에 독서와 활쏘기를 익히며 심신을 단련하던 미혼의 자제들을 국자랑(國子郞) 이라 했으며(11대 단군인 도해단제 재위 57년 -단기 3891년, 서기 전 1891년), 그들이 출행할 때에는 머리에 천지화(天指花: 무궁화)를 꽂았기 때문에 천지화랑(天指花郞)이라고도 했다한다..(13대 홀달단제 20년- 단기 3763년, 서기 전 1763년).

조선상고사에서 단재 신채호선생은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고구려의 강성은 선배제도의 창설로 비롯된 것인데 그 창설한 연대는 전사에 전해지지 아니하였으나 조의의 이름이 태조왕 본기에 처음으로 보였으니 그 창설이 태조, 차대 두 대왕 때가 됨이 옳다.

'선배'는 이두자로 선인(先人), 선인(仙人)이라 쓴 것으로써 여기서의 선인(仙人)은 선배의 소리말 '선'이요 인은 '선배'의 배를 빌려 쓴 이두문이며, 백의 (帛衣), 조의(早衣)는 우두머리 <上首>의 옷과 빛깔, 예속은 무사 모의 깃 절풍(折風)에서 유래한 것이다.

학자들간의 선인(先人, 仙人)을 관직으로만 보는 견해가 있으나 발해사에 선인을 '사 정병(士正兵)'이라 하고, 삼국 사기에 '선비는 싸움에 당(當)하여 물러서지 아니한다'고 한 것을 보아도 선인이 '선배'라 부르던 무사단(武士團)에서 유래한 이름을 알 수 있다.

'선배'는 원래 신수두(臣蘇塗) 교도의 보통 명칭이었는데 태조왕 때에 와서 해마다 3월과 10월 신수두《臣蘇塗: 신수두는 하느님(天帝,天神)을 모신 대신단(大神壇)이 있는 가장 신성한 숲(樹林)인데 하늘에 제사지내는 마니산 참성단이 이에 해당한다.

수두(蘇塗)는 신수두(臣蘇塗)의 대신단(大神壇) 을 본받아 각지방에 만든 신단(神壇)으로 마을마다 남아있던 당산(堂山)의 당집,신목(神木)등은 그 유물들이다.》 대제에 모든 사람을 모아 혹은 칼로 춤을 추고 혹은 활도 쏘며, 혹은 깨금질도 하고, 혹은 택권(택견)이도 하며, 혹은 강의 얼음을 깨고 물 속으로 들어가 물싸움도 하고 혹은 가무(歌舞)를 연(演)하여 아름다움과 추함<美惡>을 보며, 대수렵을 행하여 그 잡은 양<射獲>의 많고 적음을 보아 그 내기에서 승리한 사람<一者>를 ' 선배'라 칭하고 선배된 사람에게는 국가에서 녹(祿)을 주어 그 처자를 먹이어 가실(家室)에 누(累)가 없게 하였다.

(온달과 평강공주에 보면 온달은 3월3일 낙랑언덕에서의 사냥대회에서 1등을 함으로써 선배로 뽑힌다.) '선배'가 된 사람은 각기 편대를 나누어 한 집에서 먹고 자며, 앉으면 고사(故事)를 외우고<講> 학예를 익히며 나가면 산수를 탐험하거나 성곽을 쌓거나 도로를 닦고 군중을 위하여 강습(講習)하거나 일신(一身)을 국가와 사회에 바쳐 모든 어려움<困苦>을 사양치 않았다.'

선배중에서 선행과 학문과 기술이 가장 뛰어난 자를 뽑아서 스승으로 섬긴다. 일반 선배들은 머리를 깎고 조백(早帛)을 허리에 두르고 그 스승은 조백으로 옷을 지어 입으며 스승 중의 제일 우두머리는 '신크마리'-두대형 혹은 태대형-이라 일컫고, 그 다음은 '마리'-대형-이라 일컫고, 맨 아래는 소형이라 일컬었다.

전쟁이 일어나면 '신크마리'가 모든 '선배'들을 모아 스스로 한 단체를 조직하여 싸움터에 나아가서 싸움에 이기지 못하면 싸우다가 죽기를 작정하여 죽어서 돌아오는 사람은 인민들이 이를 개선하는 사람과 같이 영광스런 일로 보고, 패하여 물러나오면 이를 업신여기므로 '선배'들이 전장에서 가장 용감하였다.

당시 고구려의 여러 가지 지위는 거의 골품(명문)으로 얻어 미천한 사람들이 높은 지위에 오르지는 못하였지만 오직 '선배'의 단체는 귀천이 없이 학문과 기술로 자기의 지위를 획득하므로, 이 가운데서 인물이 가장 많이 나왔다.

해상잡록(海上雜錄)에서도 '명립답부(明臨答夫), 연개소문( 淵蓋蘇文)은 조의 선인 출신이다.' 라고 하였고 또 연개소문의 아들 남생(男生)이 '총명하여 9세에 선인의 한 사람이 되었다.' 하였으니 그 사실로도 선인(先人)이 단순한 관직명이 아니고 무사단 '선배'에서 비롯된 것임을 알 수 있다.

지금 함경북도 재가화상(在家和尙)이라는 것이 곧 고구려의 선배의 유종(遺種)이니 고려도경에 "재가화상은 화상(和尙:중)이 아니라 형(刑:형벌)을 받고 난 사람으로 중과 같이 머리를 깎았으므로 화상이라 한다"고 하였는데 이는 실제와 맞는 말이다.

그러나 형벌을 받은 사람이라고 한 것은 서긍(徐兢)이 다만 지나(支那 china:중국) 한대(漢代)의 죄인을 머리를 깎고 노(奴:노비)라 일컫는 글로 인하여 드디어 재가화상을 형벌 받은 사람이라 억지 판단을 한 것이다.

대개 고구려가 망한 뒤에 선배의 남은 무리들이 오히려 구 유풍(遺風)을 유지하여 마을에 숨어서 그 의무를 수행하여 왔는데 선배란 명칭은 유교도(儒敎徒 -글읽는 사대부를 선비라함)들에게 빼앗기고 그 머리를 깎은 까닭으로 재가화상이라는 가짜 명칭을 가지게 된 것이고 후손이 가난해서 학문을 배우지 못하여 조상의 옛 일을 갈수록 잊어 자기네의 내력을 스스로 증명하지 못한 것이다.

송도(고려수도 개경)의 수박(手搏)이 곧 선배 경기의 하나이니, 수박이 지나(支那)에 들어가서 권법(拳法)이 되고, 일본으로 건너가서 유도(柔道)가 되고 조선에서는 이조에서 무풍(武風)을 천히 여긴 이래로 그 자취가 거의 전멸하였다.

고구려의 선배제도는 조선의 선비정신으로 이어져 나라에 국난이 일어날 때마다 분연히 일어서 외적을 물리쳤다. 임진왜란 때의 이순신, 권율, 김시민, 곽재우, 김덕령 등 여러 장군들과 그 외 크고 작은 의병들을 이끌고 왜병을 공격했던 의병장들이 바로 이들이다.

이들은 평소에 학문과 무예를 부지런히 갈고 닦아 국난에 대비했던 것이다. 흔히 권율 장군은 문과에 급제했으니 문관으로만 알고 있지만 그는 항상 병법을 연구하고 나라안의 여러 지역들을 두루 유람하며 지형과 지세를 면밀히 살폈으며 검술에도 아주 뛰어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는 행주대첩에 앞서 1592년 남원에서 1천여 명의 전라도 의병(義兵)들을 모집하여 금산에서 무주로 넘어가는 배고개(梨峙)에서 금산에서 전주로 들어오려는 고바야카와 다카카게<小早川隆景>의 왜군 정예부대를 맞아 치열한 격전을 벌였다.

1진을 용감하게 지휘하던 동복현감(同福縣監) 황진(黃進)이 격전 중에 적탄을 맞아 중상을 입고 쓰러져 사기가 떨어지고 1진의 전열이 무너지자 2진에 있던 권율장군이 벽력같이 호령하며 도망치던 군사들을 베면서 독전(督戰)을 계속하여 왜군을 크게 격파하고 호남을 보존하였다.

권율장군의 군영(軍營)은 군기(軍紀)가 매우 엄정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전투 중에는 이곳 저곳 돌아다니며 군사들을 독려하는 한편, 제대로 싸우지 않는 비겁한 병사들은 벙거지에 칼끝으로 표시해 두었다가 전투가 소강상태에 이르면 즉시 끌어내 즉결처형을 했다 한다.

선비정신은 일제하의 여러 독립운동가들의 독립운동에도 영향을 끼쳤다. 이등박문(伊藤博文)을 사살한 안중근 의사는 말타기와 사격을 잘 했는데 뛰어난 명사수였다고 한다. 청산리대첩으로 유명한 김좌진장군은 어려서부터 병법서를 즐겨 읽고 말타기와 칼쓰기를 부지런히 익혔는데 나라가 망해가자 15세에 종들을 해방시키고 재산을 모두 나누어 준 뒤 독립운동에 투신했다.

만주에서 그를 만나본 독립운동가들의 말에 의하면 그는 동서양의 군사학에 통달해 있었다고 한다. 청산리 야간전투 때 독립군이 산정에 먼저 올라가서 양쪽으로 포위해 들어오는 일본군에게 맹렬한 공격을 가한 후 일본군이 거의 올라왔을 때 살짝 빠져나감으로써 일본군들끼리 싸워 많은 사상자가 났는데 이를 두고 이범석 장군은 회고록에서 김좌진 장군의 뛰어난 전술이라고 찬양하고 있다.

고구려는 망했지만 그들의 정신은 면면히 이어져 나라를 구했다. 이제는 이 정신을 계승하여 국가를 발전시키고 강대국들을 누르고 또한 잃었던 옛 땅도 되찾아 다시는 중국인들의 망언이 없도록 해야할 것이다. 더 나아가 단군 할아버지의 '널리 인간을 이롭게 한다' 는 홍익인간(弘益人間)의 정신을 구현시켜 모든 나라들이 더불어 잘 살 수 있도록 해야 할 것이다.
내용출처 : [기타] 인터넷 : 한단고기(桓檀古記)- 임승국 역(譯) 조선상고사- 신채호 상식 밖의 한국사- 남경태, 새길(1995)

by 용파더 | 2009/09/03 16:52 | 상고시대(펌) | 트랙백 | 덧글(0)

신라 문무왕릉비 조각 200년만에 재발견


조선시대에 발견됐다가 다시 실종됐던 신라 문무왕릉비의 조각이 200여년만에 다시 발견됐다.

국립경주박물관(관장 이영훈)은 지난 2일 경주시 동부동의 한 주택에서 신라 문무왕릉비의 상단부분을 확인했다고 3일 밝혔다.

조선시대 경주부윤을 지낸 홍양호(1724-1802)의 ’이계집(耳溪集)’은 682년 경주 사천왕사에 세워졌던 문무왕릉비의 조각들을 정조 20년인 1796년에 발견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 조각들의 탁본은 청나라 금석학자 유희해(劉喜海.1793~1853)에게 전해져 그가 쓴 ’해동금석원(海東金石苑)’에 내용이 실렸다.

이 조각들은 그 이후 있는 곳이 다시 묘연했으나 1961년 비석의 하단 부분이 경주시 동부동에서 발견돼 국립경주박물관에 소장돼 있으며 이번에 상단 부분이 발견됐다.

상단 부분은 주택의 수돗가에 박혀 있었으며 표면이 훼손되고 가장자리 등 일부는 심하게 마모됐지만 비문의 전체 내용을 읽는데는 큰 어려움이 없다고 박물관 측은 설명했다.

진정환 학예연구사는 “’해동금석원’에서 제대로 밝히지 못한 일부 글자도 실제 조각과 비교하면 추가로 판독할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면서 “조각을 안전하게 박물관으로 옮겨 보존처리를 진행할 계획”이라고 말했다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09/09/03/2009090300678.html?Dep0=chosunmain&Dep1=news&Dep2=headline1&Dep3=h1_09

by 용파더 | 2009/09/03 15:10 | 트랙백 | 덧글(0)

신라가 오키나와 670년 지배

`류구국' 건국…`서울ㆍ엄마ㆍ안사람' 오키나와 말과 유사

日 고문헌 분석ㆍ현장 답사 담은 저서 내달 출간

신라시대 우산국(지금의 울릉도) 주민 1천여명이 서기 513-514년께 일본 남단 오키나와 섬에 정착, 12세기 말까지 25대에 걸쳐 왕위를 유지했다는 주장이 제기됐다.

지난해 `독도 영토권원 연구' 논문으로 성균관대 박사 학위를 받은 선우영준 수도권대기환경청장은 일본 고문헌 조사와 3차례에 걸친 오키나와 현지 답사를 통해 오키나와의 전신인 류구국(琉球國)이 고대 울릉도 주민들의 이주로 세워진 나라라는 사실을 뒷받침하는 증거를 찾았다고 21일 밝혔다.

저서에 소개된 관련 문헌 등에 따르면 일본 고서인 `류구국구기'(琉球國舊記ㆍ1731년), `고류구'(古琉球ㆍ1890년) 등 수십권의 문헌 분석 결과 우산국은 512년 신라 이사부에 의해 복속된 직후 자원 부족 등 이유로 오키나와(`우루마'국이 전신) 남부 쿠다카 섬 등에 먼 항해 끝에 처음으로 진출했다.

당시 우산국 주민들은 마한과 백제, 고구려 계통으로 추정되는 천손씨(天孫氏)로 불리던 집단으로 울릉도에 풍부했던 느티나무로 만든 선박에 타고 오키나와에 도착한 뒤 전역으로 세력을 뻗쳐 670년간 왕위를 유지했으나 1187년 국왕이 중신에 살해된 뒤 멸망의 길을 걷게 됐다.

이후 내전 등 오랜 혼란기를 겪다 일본 에도막부가 류구국을 침공, 식민지로 만들었는데 막부측은 류구국과 한국과의 관계를 철저히 부정하고 삭제했으며 마치 구주(九州)에서 오키나와 역사가 시작된 것처럼 조작해 왔다고 저서는 주장하고 있다.

일본 학자들이 고문헌을 참조, 주민들의 혈족 계통을 연구한 결과 오키나와 남자 주민의 Y-염색체가 한반도에서 형성된 한국인 특유의 Y-염색체(O2b1a)와 대부분 동일하고 인근 대만 등의 원주민 염색체와는 판이하다는 사실이 적시돼 있어 오키나와가 한국인의 개척으로 이뤄진 나라임을 뒷받침하고 있다는 것이다.

또 오키나와에서 사용하고 있는 말과 고대 국어(또는 현대 국어)간에 음과 뜻이 유사한 단어들이 많은 것으로 파악됐다.

오키나와 신가(神歌)에 나오는 `소우루'는 `서울'의 일본 가나식 표기로 추정되고 일본학자들은 신라의 수도 `서벌(徐伐)'을 `쇼-우루'라고 읽고 있다고 보고 있다.

오키나와 치닌 지역 귀족마을에서 쓰이는 `우마니'는 우리말 `어머니'와 뜻이 같고 비슷한 발음을 내고 있으며 치닌 지역 평민 마을에서는 `암마'라고 발음된다.

오키나와 전통 언어인 `안사레'는 우리말 `안사람(안주인)'을 의미하는데 발음이 비슷하고 `바루'는 우리말의 `벌(또는 벌판, 뻘)'과 같은 말이다.

`요나구스쿠'라는 말은 오키나와에서 최초의 명문가 등을 의미하는데 `요나'는 한국어 고어 사전에 `여나'로 표기, `새로 연다'는 뜻을 가지고 있고 `구스쿠'는 한국 고어 `구즉하다'(`우뚝하다'의 의미)의 뜻으로 서로 통한다.

선우 박사는 "지금도 오키나와 곳곳에는 1천500년 전 한국 말과 문화가 그대로 남아 있다는 걸 직접 확인할 수 있다"며 "한국과 오키나와 간의 역사, 언어, 문화에 대한 보다 체계적인 연구가 이뤄진다면 한일 고대 역사의 전면적인 재해석이 가능할 것으로 본다"고 말했다.

선우 박사는 3월 중 이 같은 내용을 담은 `독도 그리고 우루마국-류구국을 찾아서'(가칭) 제하의 저서 출간할 예정
 
(서울=연합뉴스) 김성용 기자

by 용파더 | 2009/09/02 08:37 | 트랙백 | 덧글(0)

불국사의 비밀 " 내진설계"

[한겨레] 활성단층이 지나가는 불국사 일대는 우리나라에서 지반이 가장 불안정한 곳 가운데 하나로 꼽힌다. 역사문헌에는 통일신라시대인 779년에 ‘땅이 흔들리고 민가가 무너져 죽은 자가 100여명이나 됐다’는 문헌상 최대의 지진 피해도 기록됐다. 그런데도 불국사가 1200여년 동안 지진을 견디며 거의 본래 모습을 지켜온 비결은 뭘까?

불국사의 내진구조를 조사해온 황상일 경북대 교수(지리학)는 11일 “비탈진 곳에 돌을 쌓아 건물 터로 만든 불국사 남쪽과 서쪽 기단부 석축(축대)에 여러 내진공법이 적용됐음을 확인했다”며 “8세기 신라인은 돌을 활용한 세계 수준의 내진 기술을 갖추고 있었다”고 주장했다. 석축이 땅과 건물 사이에서 지진에너지를 흡수하는 완충 구실을 했다는 것이다.

황 교수는 이번 조사에서 불국사 600m 반경 안에 기존에 알려진 3개의 활성단층 외에 경내 밑을 지날 가능성이 큰 활성단층 하나가 더 있다는 사실을 처음 밝혀냈다.



그러나 대웅전 남회랑 석축과 석가탑 하부구조 등에 쓰인 ‘그렝이’ 기법(울퉁불퉁한 자연석 위에다 맞닿는 면을 맞춰 다듬은 석재를 얹는 것) 등 내진설계가 불국사를 지켜왔다는 것이다. 황 교수는 “목조 양식을 석재에 응용한 이런 구조는 지진 때 좌우 흔들림을 잘 견디고 석재들 사이에 틈을 두어 석재들의 미세한 운동과 열, 소리에너지로 지진에너지를 상당량 소모시킨다”고 말했다.

또 청운교·백운교의 ‘결구(짜맞춤)’나 석축에 박힌 ‘동틀돌’ 등에도 목조 건축양식의 내진 기능이 응용됐다. 황 교수는 “지진 때 석축 안쪽에 쌓은 석재들이 흔들리지 않게 석축에 못처럼 규칙적으로 박아둔 길이 1.8m 동틀돌의 내진공법은 세계에서 유례를 찾기 힘든 신라만의 뛰어난 건축술”이라고 말했다. 이 조사연구는 <대한지리학회지> 최근호에 발표됐다.

오철우 기자 cheolwoo@hani.co.kr

by 용파더 | 2009/09/02 08:31 | 다국시대(펌) | 트랙백 | 덧글(1)

고조선 중국 내륙에..

앵커: 고조선이 일반적으로 알려진 것보다 더 넓었다는 학설이 제기됐습니다. 고조선 계통의 유물이 중국 요서 지방에서 출토됐습니다. 김성우 기자가 취재했습니다.

 

기자: 기원전 108년, 한나라에 의해 설치된 한 4군은 지금의 평양의 낙랑, 오른쪽에 임둔 , 오른쪽에 진번 그리고 만주 동부와 함경도에 현도가 위치했는 게 통설입니다. 그런데 임둔 이라는 글자가 적힌 유물이 중국 요서지방인 요녕성 진시시 소왕대에서 발견된 사실이 최근 단국대 박물관 복기대 박사의 논문에서 밝혀졌습니다. 공문서를 넣은 상자 등에 함부로 뜯어볼 수 없도록 진흙을 바르고 직인을 찍은 복리가 바로 그 유물인데 규격과 서체로 볼 때 한의 중앙 정부가 인근 태수에게 보낸 것입니다. 더욱이 복리 출토 성토에서는 고조선 계통의 유물이 다량으로 나와 바로 이곳이 임둔 소재지임을 밝혀준다고 복 연구원은 말합니다. 임둔 이 요서지방에 있었다면 낙랑은 그 왼편에 있을 수밖에 없습니다. 이에 따라 한 4군의 전신인 위만조선과 고조선의 위치가 한반도가 아니라 요하를 중심으로 한 중국 내륙쪽에 존재했을 가능성이 매우 커졌습니다.

 

인터뷰: 우리나라의 상고사인 고조선이 만주지역으로 비장이 될 수 있는 것이고 그럼 만주지역으로 비정이 된다고 할 때는 우리나라 상고사 전체의 틀이 한번 바뀔 수 있는 거죠.

 

기자: 이번 연구결과로 일제강점기 일인학자들이 한반도 위치설의 결정적인 증거로 제시했던 평양지역의 낙랑유물 유적부터 전면적인 재검토가 필요한 것으로 보입니다. MBC뉴스 김성우입니다. 

 

 

by 용파더 | 2009/08/18 13:22 | 상고시대(펌) | 트랙백 | 덧글(0)

광개토태왕비,누가 왜 옮겼나?

참고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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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보> 광개토태왕비,누가 왜 옮겼나?
37톤의 무게를 견딜 크고 견고한 받침대없이 허술하게 만들었겠는가!
 
성훈 칼럼니스트
 
본 글은 장문이라 아래와 같이 1부와 2부로 나누어 며칠 간격으로 게재합니다.

(1부) 태왕비 위치에 대한 의혹제기
(2부) 옮긴 이유와 비문위조의 이유 분석


중국 길림성 집안현 통구에 고구려 19대 광개토태왕의 비가 우뚝 서있다. 광개토태왕의 원 시호(諡號)는 ‘국강상광개토경평안호태왕'(國岡上廣開土境平安好太王)으로 줄여서 '호태왕'이라고도 한다. 이 비는 아들인 장수왕이 414년에 세운 것으로, 비는 커다란 각력응회암(角礫凝灰岩)으로 된 불규칙한 직4각형의 기둥 모양으로 된 4면 비(碑)이다.  

▲  1927년 부터는 이층누각을 세워 비문과 위치가 조작된 비를 보호했다.

비는 1876~80년 발견된 이후부터 주목을 받아, 당시 집안현 지사였던 유천성(劉天成) 등의 모금으로 비바람의 침식을 막기 위해 1928년에 2층으로 된 비각을 설치했다. 이 비각은 1976년에 낡아서 붕괴의 위험이 있다고 하여 철거되고, 1982년에는 중국 당국에 의해 대형 비각이 세워지고, 2005년 세계 문화유산으로 등재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비의 높이는 6.34m로 윗면과 아랫면은 약간 넓고 중간부분이 약간 좁다. 아랫부분의 너비는 제1면이 1.48m, 제2면이 1.35m, 제3면이 2m, 제4면이 1.46m이다. 아래에 화강암의 받침대(대석)를 만들었는데 길이 3.35m, 너비 2.7m의 불규칙한 직4각형이고, 두께는 약 15~20cm로 고르지 않다.

문자의 크기와 간격을 고르게 하기 위해 비면에 가로·세로의 선을 긋고 문자를 새겼다. 제1면 11행, 제2면 10행, 제3면 14행, 제4면 9행이고, 각 행이 41자(제1면만 39자)로 총 1,802자인 이 비문은 삼국의 정세와 일본과의 관계를 알려 주는 금석문이다. 비문의 내용은 크게 ① 서언(序言)격으로 고구려의 건국 내력을, ② 광개토태왕이 즉위한 뒤의 대외 정복사업의 구체적 사실을 연대순으로 담았으며, ③ 수묘인연호(守墓人烟戶)를 서술하여 묘의 관리 문제를 적었다.  

 

 

 

 

 

 

 

 

 

 

 


 

▲  광개토태왕 비의 제원.  받침대가 3면으로만 되어있고, 작아서 하중을 이기지 못하여 여러 조각으로 깨어져 있다.
 
여하튼 이 광개토태왕 비는 우리 고대사의 숙제를 풀어줄 유물임에 틀림없다고 하겠다. 그러나 위치가 분명 옮겨진 것 같은 의혹이 있고, 일제가 비문의 내용 중 광개토태왕이 왜를 정벌한 부분을 조상의 수치로 여겨 전부 훼손해 버렸고, 이 비문을 일부 위조해 조선 침략의 정당성의 이론이 되는 임나일본부설(任那日本府說)을 조작하기도 했다.

그러나 전 서울대 천문학과 박창범교수의 <삼국사기> 일식기록 분석으로 한반도에는 백제/신라가 없었고, 일본의 전신인 왜가 있었던 위치도 현 일본열도가 아니라 중국 대륙 남쪽 광동성이나 가까운 섬이었음이 밝혀짐으로서 임나일본부설은 허구임이 명백하게 밝혀졌다. 그런데 이 비는 비문 조작뿐만이 아니라, 아래와 같이 그 위치에 대해 여러 의문이 있다.

▲  좌측은 일본서기 628~709년의 일식분석으로, 당시 왜는 중국대륙 남단이나 남지나 해상의 섬에 있었다. 우측은 1189년 이후의 일식분석으로 정확히 일본열도이다. 628년 이전은 일본이 아니라 왜였으나 백제의 분국이나 마찬가지로 삼국과 같은 독자적인 국가로 보기 어렵다.
 
1) 비에 대한 기록이 왜 없을까?

처음 비가 발견된 것이 1876~80년경으로 알려져 있는데, 이렇게 거대한 비가 왜 그 이전에는 그 자리에 있었다는 우리의 어떠한 기록도 없고 어떻게 그 때까지 발견되지 않았을까? 조선시대 사서에 아래와 같이 압록강 건너 집안지역에 있는 비에 대한 몇 가지 기록이 남아 있다.

▲  근처 아불란사 터에 있는 높이 3~4m의 이 대석이 우리 기록에서 언급한 대금황제능비로 보인다.

<용비어천가 제39장 압강(鴨江) 주해>

<皇城> 平安道江界府西越江一百四十里, 有大野中有古城 諺稱 大金皇帝城 城北七里有碑

평안도 강계부 서쪽 강 건너 백사십리에 있는 큰 들 가운데 대금황제성이라 칭하는 고성이 있고 성 북쪽 7리에 비가 있다. 

<동국여지승람 권55 강계부 산천조>

<皇城平> 距滿浦三十里. 皇帝墓. 在皇城平. 世傳金皇帝墓. 碑石爲之  高可十丈

만포 삼십리 거리 황성평에 금황제묘라 전하는 황제묘가 있고 10장 높이의 비석이 있다.

<강계읍지 : 1830년 찬 1872년 교정>

<皇帝城> 在伐登鎭被鴨綠江邊. 城郭尙今宛然. 金國初都云. 皇帝墓 在皇城平上一里許 有立碑. 高可十丈. (금나라 초 도읍이라고 전해지는 성곽이 있다는 내용 외에는 위의 기록과 내용이 거의 대동소이하다.)

1830년에 편찬되고 1872년에 교정된 강계읍지에도 분명 <동국여지승람>과 똑같은 내용이 적혀 있다. 그런데 호태왕 비가 발견된 근처 아불란사 터에 높이 3~4m 정도 되는 큰 석주가 있다. 필자는 이 석주가 위의 기록과 일치하는 금황제의 비석으로 생각된다.
물론 10장(丈)의 높이가 당시 얼마였는지 정확히 알 수는 없으나, 통상적으로 1장을 3m라 했으니 약 30m 정도인데 비석의 높이로는 있을 수 없는 것이다. 아마 10척(尺)의 오기로 본다. 아불란사 터 석주의 높이가 약 10척이고, 호태왕비의 높이는 20척이다. 그렇다면 1872년 이전에 호태왕비는 집안에 없었다는 것을 기록으로 입증했다고 할 수 있다. 


 

▲  명나라의 기록인 명일통지의 조선영토

고구려 광개토태왕과 장수왕 때의 주 강역은 분명 하북성이었다. 그런데 태왕묘와 호태왕비가 한참 떨어진 집안에 있었다니 잘 믿기지는 않지만 그럴 수도 있다. 집안에는 고조선과 고구려의 것으로 추정되는 피라미드가 산재해 있다. 원래 대전 현충원과 같은 신성한 소도와 같은 분묘도시이기 때문에 집안에 태왕의 묘를 세울 수도 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호태왕비는 여러 가지 기록으로 보아 거기에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집안 지역은 현재 우리 사학계에서는 부인하고 있지만 분명 고려의 영토였다. 그렇다면 고려의 사서에 이 비에 대한 기록이 남아있어야 한다. 그리고 이 지방은 중국의 여러 기록에서‘조선의 영토는 동서이천리 남북사천리’라 했듯이 조선의 영토이기도 했는데,  설사 조선의 영토가 아니었다고 하더라도 서간도를 개척할 당시 이렇게 큰 비가 우리 주민에 의해 발견되지 않았을 리가 없다. 그런데 조선의 사서에도 이 비에 대한 기록이 없는 것으로 보아 호태왕비는 원래 집안에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2) 왜 비문의 기록과 다른 평지에 있나?

호태왕 비문에는 ‘以甲寅年 九月九日乙酉 遷就山陵 於是立碑 銘記勳績 (갑인년 9월9일 을유에 산릉에 모시고 비를 세워 훈적을 기록한다.’고 조각되어있다. 현재 비의 서남쪽 약 300m 지점에 있는 태왕릉(太王陵)은 부근에서 "願太王陵安如山固如岳"이라는 명문이 새겨진 벽돌이 발견되어 학계에서 광개토태왕의 릉으로 비정되었다.

그런데 현 태왕릉은 산릉이 아니고 평지에 조성되어 있다. 그러므로 현 태왕릉은 분명 광개토태왕의 능이 아닌 것이 확실하다. 태왕이라는 칭호를 쓴 다른 왕이 다른 어느 시대인가 있었거나, 누군가가 비를 옮겨다놓고 명문이 새겨진 벽돌을 능에 갖다놓은 것으로 보인다. 이 능이 어느 왕조 누구의 능인지는 필자도 알 수가 없지만, 분명한 것은 그 무덤의 주인공이 광개토태왕이 아닌 것은 확실해 보인다.  


 

 

▲  1900년대 초의 비석. 압록강과 산 사이의 평지에 관석과 대석도 없이 서 있다. 옆에 민가가 있는 것으로 보아 분명 비문에 나와있는 산릉이 아니지 않은가! 그리고 이렇듯 민가도 있었는데 왜 1876년 이전에는 발견 안 되었을까?
 
그렇다면 현 집안에 있는 이 호태왕비는 과연 원래 어디에 있었을까? 그 위치를 정확히 추정할 수는 없지만 분명 중국 땅 어딘가에 있었기 때문에 고려나 조선의 기록에 없는 것이고, 또 그 비를 누군가가 옮겼기 때문에 비문에 기록된 산릉과 다른 평지에 비가 서있다고 보는 것이다.

만일 옮겼다면 비의 무게가 37톤이나 되기 때문에, 육상으로의 운송은 현실적으로 많은 사람의 눈에 쉽게 띄어 불가능했을 것이고 아마 강을 따라 선박으로 옮겼을 가능성이 크다. 집안이란 압록강변으로 옮겨놓은 것으로 보아, 아마 고구려의 핵심강역이었던 하북성 연산산맥 어딘가에 있었던 것을 배를 이용해 옮긴 것으로 추정한다.

참고로 김성겸선생이 해석한 남당유고집 고구려사략에 보면 ‘태왕을 황산(黃山: 서안동조양산-西安東朝陽山)에 장사지냈다’고 되어 있다. 황산의 위치는 현재 알지 못하나, 조양이라는 지명은 북경 근처에 있다. 여하튼 하북성 북부를 흐르는 강은 난하와 조백신하 그리고 영정하가 있다. 이 강 중에 고구려의 수도였던 곳으로 들어가는 강이 과연 어느 강일까?

<삼국사기 고구려본기>에 보면, 동천왕 때 위나라 관구검이 쳐들어와 환도성을 함락하고, 수하 장수를 시켜 추격하니 왕이 남옥저로 달아나는데, 죽령에 이르러 유유와 밀우장군이 목숨을 바쳐 왕을 지키는 활약이 나온다. 여기서 남옥저는 어디일까? 사학계는 남옥저를 함경도 북청일대로 비정하고 있다.

그러나 남옥저는 함경도가 아닌 요녕성 일대에 있었다. <한단고기 대진국본기>에 나와 있기를, ‘대진국의 남경인 남해부는 본래 남옥저의 옛 땅이다. 지금의 해성현(海城縣)이 그것이다.’해성현은 현 지명 해성시로 요녕성 요양과 가까워 고구려 패망 시에 사비성(沙卑城)으로 여러 사서에 많이 등장하는 지명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고구려의 당시 수도였던 환도성은 현 길림성 집안이 아니라 하북성이 맞다고 하겠다. 집안에서 관구검 기공비가 발견되었다. 위나라 유주(북경)자사인 관구검이 북경 일대에서 현 집안으로 쳐들어와 환도성을 함락시키고 남옥저(요녕성)로 달아나는 동천왕을 추격한 것이 아니고, 북경 쪽에서 하북성에 있던 환도성을 함락시키고 남옥저(요녕성) 땅으로 도망온 동천왕을 계속 추격해 길림성 집안까지 왔다고 봐야 그 순서가 맞고 행적이 맞는 것이다.  

필자의 견해로는, 고구려의 도읍은 국내성과 환도산성이었으므로 국내성(안시성)과 환도산성으로 추정되는 난하 중류의 현 청룡산성(한단고기의 태조대왕의 요서 10성 중 개평 동북방 70리에 있는 안시성으로 추정)과 인근의 도산(都山: 丸都山城으로 추정) 부근에 원래 호태왕의 산릉이 있었다고 보는 게 유력하다 하겠다.
 
▲  좌측은 국내성과 환도성의 위치. 우측은 호태왕비와 태왕을이 있는 위치. 누군가가 고구려의 수도인 국내성의 위치를 집안으로 위조하기 위해 비석을 몰래 평지에 가져다 놓은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완전범죄는 없는 법이다.
 
3) 받침대(대석)가 없는 비도 있나?

무게가 37톤이나 되고, 높이가 6.34m나 되는 거대한 응회암으로 된 비석을 세우려면 당연히 지반침하를 막아야 하고, 넘어지는 것을 방지하기 위한 거대한 받침대(대석)가 있어야 하는 것은 당연한 것으로 상식 중의 상식이다.  

▲  현재 37톤의 하중을 이기지 못하여 깨어져 있는 받침석. 120년 정도에 이렇게 깨진 받침석은 원래 것이 아니다. 
 
그런데 사진으로 본 1900년 초의 비석은 받침대(대석) 없이 그냥 땅위에 서 있던 것으로 보인다. 받침대도 없는 상태에서 지반침하도 없이 1,500년을 버텼다는 것은 솔직히 상식으로는 잘 이해가 안된다. 

▲  발견 초기의 비석 모습. 필자 눈에는 아래에 받침석이 없는 것으로 보인다. 독자들은 받침석이 보이시는지?
 
현재 가로 세로 2.7m X 3.35m 높이 약 20cm의 화강암으로 된 받침대가 있는데, 3부분으로 나뉘어 깨져있다. 그리고 이상한 점은 받침대 가운데 비가 있는 것이 아니고, 한쪽 끝에 비가 있다는 것이다(제원사진참조). 비신이 있던 부분은 현재 약 5cm 가량 침하되어 있고, 대석 전체가 15-20cm 침하되어 있다. 즉 받침석이 비에 비해 너무 작고 형편없이 조잡하고 약하다는 점이다. 불과 약 120년 사이에 그 정도 침하되고 훼손되었다고 보면 된다.

고구려 때 황제비의 받침대(대석)을 이렇게 허술하게 만들었을 리가 없다. 분명 37톤의 무게를 오랫동안 견디도록 받침대를 크고 견고하게 만들었을 것이고, 만일 비를 세우고 120년 만에 이렇게 침하되었다면, 분명 후대의 왕 누군가가 제대로 다시 대석을 크고 튼튼하게 만들었을 것임에 틀림없다. 그런데 현재의 대석은 너무 작고 하중을 못 견딜 정도로 부실하다보니 깨지고 망가진 것이다.  

▲  1900년대 초의 태왕비는 받침석이 없던 것으로 사진에 보인다. 위 사진과 다른 방향에서 찍은 것임.
 
4) 관석도 없는 묘비가 있나?

▲   조선 5대 문종대왕의 비석. 관석과 받침석이 크다.

보통 다른 묘비에는 대부분 관석이 씌어져 있다. 일반인의 묘비에도 반드시 관석를 세우는  법이다. 하물며 제왕의 공적비인데 관석을 안 세웠을 리가 없다. 호태왕비도 상부는 약간 뾰족하게 되어 있고 상부에 가공 흔적이 있는 것으로 보아 원래 관석이 있었던 것으로 추측된다. 그리고 그 관석은 엄청 컸을 것으로 추정되어 인력으로 쉽게 오르내리기에 분명 힘들었을 것이다. 이건 개인이 아닌 조직이 동원되어 관석이 내려진 것으로 보인다.

원래 비가 있던 장소에서 관석을 내리고, 비를 배로 옮긴 다음 집안에다 비를 세우고, 다시 관석을 올리기가 사실 쉽지 않았을 것으로 판단된다. 그래서 관석은 그냥 어딘가에 버리고 비만 달랑 받침대(대석)도 없이 세운 것으로 보인다. 비를 세우려면 비문의 기록과 같이 산릉(山陵)에 올려야 하는데 비가 워낙 커서 편의상 압록강과 산 사이의 평지에 그냥 세운 것으로 보인다.
  
 



 

▲   광개토태왕 비의 맨 윗부분은 가공의 흔적이 있는 것으로 보아 애초에는 관석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2008/03/07 [21:15] ⓒ pluskore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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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마 일제에 의해 옮겨졌을 가능성이 크다 봅니다윤복현08/03/07 [22:39] 
 
[성헌 칼럼니스트:고구려의 당시 수도였던 환도성은 현 길림성 집안이 아니라 하북성이 맞다고 하겠다. 집안에서 관구검 기공비가 발견되었다. 위나라 유주(북경)자사인 관구검이 북경 일대에서 현 집안으로 쳐들어와 환도성을 함락시키고 남옥저(요녕성)로 달아나는 동천왕을 추격한 것이 아니고, 북경 쪽에서 하북성에 있던 환도성을 함락시키고 남옥저(요녕성) 땅으로 도망온 동천왕을 계속 추격해 길림성 집안까지 왔다고 봐야 그 순서가 맞고 행적이 맞는 것이다. ..고구려 때 황제비의 받침대(대석)을 이렇게 허술하게 만들었을 리가 없다. 분명 37톤의 무게를 오랫동안 견디도록 받침대를 크고 견고하게 만들었을 것이고, 만일 비를 세우고 120년 만에 이렇게 침하되었다면, 분명 후대의 왕 누군가가 제대로 다시 대석을 크고 튼튼하게 만들었을 것임에 틀림없다. 그런데 현재의 대석은 너무 작고 하중을 못 견딜 정도로 부실하다보니 깨지고 망가진 것이다. . .집안 지역은 현재 우리 사학계에서는 부인하고 있지만 분명 고려의 영토였다. 그렇다면 고려의 사서에 이 비에 대한 기록이 남아있어야 한다. 그리고 이 지방은 중국의 여러 기록에서‘조선의 영토는 동서이천리 남북사천리’라 했듯이 조선의 영토이기도 했는데, 설사 조선의 영토가 아니었다고 하더라도 서간도를 개척할 당시 이렇게 큰 비가 우리 주민에 의해 발견되지 않았을 리가 없다. 그런데 조선의 사서에도 이 비에 대한 기록이 없는 것으로 보아 호태왕비는 원래 집안에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성선생님의 견해처럼 엄청난 무게에 달하는 37톤의 무게를 견딜 크고 견고한 받침대없이 허술하게 만들었겠습니까? 일제가 왕검성이 북한의 평양이라고 역사를 왜곡하기위해 번조선의 수도이자 번조선의 왕검성을 함락시킨 위만조선의 수도였던 하북성 창려지역의 돌비석을 북한 평양지역으로 갖다놓았는데, 북한 학자들이 명확히 돌자체가 성분상 북한의 돌이 아님을 과학적으로 밝힌 적이 있습니다.. 광개토태왕비 또한 그럴 요지가 충분합니다. 만주 집안지역의 1만5천기의 피라미드들은 고구려 유적지가 아니라, 배달국 시대와 단군조선시대의 유적지로 보아야 맞다고 봅니다. 고구려 무덤의 특징은 그림자체가 없는 피라미드 양식이 아니고 화려한 그림들로 치장된 무덤양식이기 때문입니다. 집안지역은 고구려가 조상들의 유적지로 성스럽게 생각한 성지로 생각한 장소였다고 보면 맞지 않을까 싶습니다.그래서 고구려이전의 유적지에 불과한 피라미드 무덤들을 가지고 마치 장수왕과 광개토태왕의 무덤인양 세뇌시켜온 만주지역의 장군총이네 태왕릉이네 하는건 식민사관의 왜곡이라고 보여지며, 장수왕과 광개토태왕의 무덤은 만주에 있지 않고 하북성 지역에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또한 서안지역의 대형 피라미드들은 만주 집안지역의 피라미드보다 규모가 큰 것으로 보아 소형 피라미드들이 군집한 만주 집안지역의 연대가 훨씬 앞선다고 보여 집니다. 소형에서 대형으로 발전하는 이치에서도 그렇고 또한 세계 피라미드 무덤양식의 기원(남방식 고인돌 무덤양식)이 되는 고인돌들이 밀집된 한반도에서 만주와 유라시아 대륙으로 확산된 한반도 문명에서 기인한다고 보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쥐나정부는 서안지역과 집안지역의 피라미드들에 대한 출입을 철저히 통제하는 사유가 된다고 봅니다.
광개토태왕 비문과 위치 조작의 진실
비를 옮긴 장본인은 중국이고,비문은 중국과 일본이 훼손했다
 
성훈 칼럼니스트
 

며칠 전 광개토태왕 비를 옮겼다는 몇 가지 의문점을 언급했으나 사실 확실한 물증은 아직 없다. 그러나 심증은 99.9%로 거의 확실하다. 그럼 누가 언제 왜 비를 원래 장소에서 압록강변 집안으로 옮겼을까를 유추해 보기로 한다. 

누가 언제 왜 비를  옮겼을까?

우선 비를 옮긴 시기는 조선의 강계읍지가 교정 발행된 1872년부터 비가 최초 발견된 1876년 사이로 봐야 한다. 일제가 중국에 본격적으로 진출한 때가 1894년 청일전쟁 이후이므로,  일제가 주동해 이 비를 옮겼다고 볼 수는 없고 청나라가 비를 옮겼다고 본다. 그럼 청나라는 왜 이 비를 옮겼을까?



 

▲  동치제가 6살에 즉위하자 섭정은 주로 서태후가 했다.
비가 옮겨졌을 것으로 추정되는 1872~1876년 사이의 청나라는 동치제(1861~1875)와 광서제 초기시대였다. 태평천국의 난과 아편전쟁을 겪은 청나라는 이른바‘동치중흥’이라 불리는 자강(自强)의 기치를 내세운 ‘양무운동(洋務運動)’을 3기로 나누어 추진했다. 이 운동은 청일전쟁의 패배로 끝내게 되는데, 일면 성공한 듯했으나 보수 사상에서 탈피 못하고 제도개혁이 뒷받침되지 못해 소기의 성과를 올리지는 못하였다. 여하튼 당시 그러한 자각이 있어 국가의 문물을 재정비하게 되고 서구의 발달된 과학기술을 받아들이게  된다. 이 운동과정에서 분명‘중국 역사세우기’가  있었을 것이고 그 일환으로 호태왕비가 중국인에 의해 옮겨졌을 것으로 보인다. 예전부터 중국은 이런 역사왜곡을 이미 많이 해왔었다. 그 대표적인 것이 사서에 나오는 요하(遼河)의 위치 변경이고, 중국은 호태왕의 업적을 중국의 수치로 여겨 중국 25사에서 그 기록을 이미 다 지워버렸다. 

또한 중국(청나라)이 비를 옮겼다는 사실은 단재 신채호선생의 <조선상고사>라는 책에서 비문을 답사한 내용을 적어놓는 대목에서 찾을 수 있다. 책의 내용은 아래와 같다.

(전략) 광개토태왕의 비문 가운데 선비 정벌에 대한 문구가 기재되지 아니하였음은 무슨 까닭인가? 내가 일찍이 호태왕의 비를 구경하기 위해 집안현에 이르러 여관에서 만주사람 잉쯔핑(英子平)이란 소년을 만났는데, 그가 필담으로 한 비에 대한 이야기는 다음과 같았다.

"碑가 오랫동안 풀섶 속에 묻혔다가 최근에 잉시(榮禧:만주인)가 이를 발견했는데, 그 비문 가운데 고구려가 땅을 침노해 빼앗은 글자는 모두 도부로 쪼아내서 알아 볼 수 없게 된 글자가 많고, 그 뒤에 일본인이 이를 차지하여 영업적으로 이 비문을 박아서 파는데, 왕왕 글자가 떨어져 나간 곳을 석회로 발라 알아볼 수 없는 글자가 도리어 생겨나서 진실은 삭제되고 위조한 사실이 첨가된 듯한 느낌도 없지 않다."

그러니까 이 비문에 호태왕이 선비를 정복한 큰 전공이 없음은 삭제된 때문이다. 아무튼 호태왕이 평주를 함락시키고 그 뒤에 선비의 쇠퇴를 타고 자꾸 나아갔다면 호태왕이 개척한 토지가 그 존호 이상으로 넓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미 말한 바와 같이 호태왕은 동족을 사랑하는 이였으므로 연(燕)나라 신하인 풍발이 연왕(燕王)을 죽이고, 고구려 선왕의 서손으로 연나라에서 벼슬하던 고운을 세워 천왕(天王)이라 일컫고 호태왕에게 보고하니, 호태왕은 “이는 동족이니 싸울 수 없다.”하고 사신을 보내 즉위를 축하하고 촌수를 따져 친족의 의를 말하고 전쟁을 그만두니 호태왕의 북진정책이 이에 종말을 고하였다. (후략)  

▲  유네스코 문화유산에 등록된 광개토태왕 비의 현재 모습. 중국에 의해 누각에 갇혀 신음하고 잇다.
 
위 책의 내용에서와 같이 비를 옮긴 장본인은 중국(청나라)으로 고구려가 선비를 정벌한 내용을 지워버리고, 고구려의 강역을 축소왜곡하기 위해 하북성에 있던 비를 집안으로 옮겨놓은 것으로 보인다. 비가 오랫동안 풀 속에 묻혀있었다는 만주소년의 진술에서 알 수 있듯이 최초에는 비를 옮겨다가 세우지도 않고 그냥 평지에 버리고 간 것을 나중에 집안사람들이 발견하고는 세운 것으로 보인다. 중국 사람들이 비를 옮겼기 때문에 당시 비문의 내용 중 자기네와 상관없을 것으로 본 왜와 관련된 내용을 없애지 않은 것이다.

그리고 <삼국사기>에 언급된 것과 똑같이 고구려와 연나라(선비족)는 동족(同族) 또는 종족(宗族)이었고, 새로 왕이 추대된 고운은 친족(親族)이라는 사실을 단재선생은 말씀하시고 계시다. 연나라에서 신하였던 한족 풍발이 역시 신하였던 고운을 추대했다고 한다. 연나라 전왕(前王)들이 고씨가 아니면 이는 역성혁명이다. 왕의 성이 달라지면 당연히 다른 왕조이나, 같은 나라로 간 것을 보면 연나라는 자고로 고(高)씨의 나라가 맞는 것이다. 모용씨는 나중에 바꾼 것으로 보인다.

혹자는 이런 질문을 할 수도 있다. “만주족은 사실상 고구려-->대진국-->요나라-->금나라-->청나라로 이어지는 적장자인데, 청나라가 뭐 하러 조상인 고구려 광개토태왕비를 옮기겠는가?”맞는 말이다. 그러나 청나라 초기에는 자신들이 동이족의 후예임을 표방했으나, 중원을 지배한 이후로는 한족(漢族)에 동화되어 그러한 의식이 쇠약해진다. 특히 말기로 내려오면서 그런 의식이 희박해졌고, ‘동치중흥’은 중국을 중흥시키자는 정책이지, 중국인에게 만주족이 고구려의 후예임을 강조하자는 정책은 아니었다.

▲ 내몽고와 몽고는 민족과 북부여/고구려의 고향

중국은 자신들과 직접 관련된 선비족 정벌의 비문 내용을 없애면서 광개토태왕 6년 북으로 현 내몽고지방의 염수(鹽水)를 정벌하고, 8년 남으로 토곡혼(吐谷渾: 현 티베트)을 순시했다는 내용은 없애지 않았다. 즉 염수와 토곡혼은 자기네 땅이 아니란 이야기이다. 이는 청나라 만주족이 주동이 되어 비를 옮긴 것이 아니라, 중원의 한족이 주동이 되어 비를 옮겼다는 것을 간접적으로 암시하고 있다고 하겠다.

일제와 중국에 의해 비문이 파괴된 상태에서도 광개토태왕 시절 정복한 최대 영토가 어디까지였는지 유추할 수 있어 눈길을 끈다. 중국과 일제는 광개토태왕에게 염수의 상류와 토곡혼만 정벌 당하고 그 사이에 있는 중국 땅은 정벌되지 않았다는 것을 말하고 싶었던 것 같다. 참으로 웃기는 짜장면과 우동이라 아니할 수 없다. 호태왕이 군대를 이끌고 토곡혼(티베트) 정벌할 때 비행기라도 타고 갔단 말인가? 

 

 

 

 


 

▲  토곡혼(티베트)의 위치. 대륙 서남부까지 고구려의 영역이었다. 대륙 동부와 남부를 거쳐 간 것으로 보인다.

하북성에 있던 고구려가 토곡혼(티베트)을 가려면 중원을 가로질러 가던가, 중원에 있던 5호16국을 피하려면 대륙 동부인 산동성을 거쳐 양자강을 지나 남부인 복건성과 광동성을 거쳐 운남성으로 가야 한다. 즉 이는 중국 대륙의 동부(백제와 신라)와 남부(왜)가 다 광개토태왕에게 정벌 당했다는 이야기와 같고, 과학적으로 박창범교수의 일식 기록 분석이 이를 뒷받침해 주고 있다. 여하튼 이러한 사실은 중국과 일본이 미처 생각하지 못했던 것 같아 보인다.

이상과 같이 광개토태왕비가 중국에 의해 옮겨졌다는 것을 알아보았다. 그런데 이것과 비슷한 사건이 또 하나 있었다. 1913년 일제가 하북성 갈석산에 있던 점제현신사비를 평안남도 온천군으로 옮긴 것도 이것과 같은 맥락이다. 점제현 신사비는 한사군이 한반도 북부에 있었다는 것을 유물로 입증하기 위해 반도사관 정착의 일환으로 일제가 옮긴 것이다. 점제현은 한사군의 핵심인 낙랑군에 소속된 행정단위였다. 그 신사비가 있었던 낙랑군 점제현을 현 평남 온천군으로 조작하기 위해 옮긴 것이다. 

 

 


 

 

 

▲  일제는 갈석산에 있던 신사비를 평남 온천군으로 옮긴다. 원래 사서에 나오는 갈석산은 진장성이 끝나는  황하 동쪽 산서성 태원 위쪽에 있는 백석산으로 보인다.  이미 중국은 산 이름과 신사비 위치를 조작했던 것으로 보인다.
 
점제현신사비는 북한에서 과학적인 방법(핵분열 흔적법)으로 옮겨졌다는 것을 입증했다. 그러나 이 호태왕비는 현재 중국 땅에 있는 유물이므로 북한이나 우리가 마음대로 조사를 못하고 있다. 만일 조사가 허락된다면, X-Ray 투시로 비가 옮겨졌는지 아닌지 쉽게 판명할 수 있으나, 중국 자신이 옮긴 고구려의 유물이므로 중국정부가 그것을 허락할 리가 없지 않은가!

중국은 광개토태왕비를 하북성 난하 중류에서 압록강변 집안으로 옮겨다 세워놓았고, 일제는 이를 근거로 나중에 좁은 집안의 평지에서 15km2 밖에 안되는 곳을 고구려인 수도인 국내성으로 비정했고, 거기서 얼마 안 떨어진 산 정상을 환도산성으로 비정했다. 왜 그랬을까? 광개토태왕비나 점제현신사비나 둘 다 이른바 중국과 일제가 각각 추진한 역사왜곡을 유물로 정착시키기 위한 음모이며 흉계였던 것이다. 
 
▲  중국과 일제에 의해 조작되고, 한국의 강단사학계에 의해 고착된 고구려의 수도 국내성과 환도산성. 그러나 이 거짓말은 과학에 의해 허구임이 명백하게 밝혀진다. 고구려의 수도는 하북성에 있었다.
 
일제에 의한 본격적인 비문 조작

▲   신묘년 기사는 글자 자체를 위조했다는 이론이 끊이지 않고 있다.

나중에 광개토태왕비를 수중에 넣은 일제는 관동군 정보장교 사케오가케노부(酒句景信)가 가져온 원본 탁본을 보고는 학자들에게 연구를 시킨다. 그리고 비문에 석회를 발라 글자를 훼손하고 조작하고 탁본을 떠서는 만천하에 공개한다. 특히 광개토태왕이 왜를 정벌한 내용은 철저히 없애버리고, 신묘년 기사를 위조해 조선 지배의 정통성의 이론적 근거가 되는 임라일본부설을 임의조작하게 되는 것이다.

(倭以辛卯年來渡海破百殘□□□羅以以爲臣)의 신묘년 기사에 대한 일본 측 해석은 "신묘년 왜가 바다를 건너와서 백제와 가야와 신라를 파해 신민으로 삼았다" 이고, 우리 해석은 고구려를 주체로 하여 (고구려는) 왜가 신묘년에 바다를 건너와 파하고, 백제.가야.신라를 신민으로 삼았다. 분명한 것은 고구려 비에 왜가 주체가 될 리가 없지 않은가? 그리고 일제가 신묘년 기사의 글자를 아예 변조했다는 학설이 끊임없이 제기되고 있다.

 

 


 

▲ 일본서기의 일식기록을 분석해 보니 초기 왜의 위치는 남지나 해상의 섬이었다. 중국 사서의 기록과 일치한다.
일제가 이 신묘년 기사를 강조하는 이유는 예전에 일본의 조상들이 가야 땅에 임나일본부를 설치해 200년간 지배한 적이 있다는 학설로, 조선의 조상들이 옛날에 일본의 지배를 받았으므로 지금 조선이 일본의 지배를 받는 것은 지극히 당연하다는 논리를 강조하기 위함이었다. 얼마나 이 이론이 허황된 것인지는 박창범교수가 일본서기에 나와 있는 일식기록을 분석하여 일본의 전신인 왜의 위치가 밝혀짐으로서 더 이상 학설로서의 가치가 없다고 하겠다.

일제의 허구인 임나일본부설로 인하여 조선은 단군 이래 나라를 통째로 빼앗기는 재앙 중의 대재앙을 맞는다. 36년 만에 해방을 맞이하긴 했지만 일제의 잔재는 아직도 여러 방면에 많이 남아 있다. 물론 해방 후 올바른 위정자를 만나지 못해 친일을 제대로 청산하지 못한 이유가 제일 크겠지만, 과학적인 분석으로 임나일본부설이 허황되게 날조된 이론이라는 것을 밝히게 해준 박창범교수에게 이 자리를 빌어 심심한 사의를 표하는 바입니다. “역사의 진실을 밝힐 수 있게 해 주셔서 정말로 고맙습니다.”

<한단고기>를 엮은 계연수선생은 1895년에 비를 답사하여 비문의 내용을 적어 놓았는데, 1912년 비를 재답사한 계연수선생은 비문 중 광개토태왕이 왜를 정벌한 내용이 크게 훼손되어 있음을 발견한다. 1931년 제자 이유립선생은 계연수선생의 ‘비문징실(碑文徵實)’을 세상에 선보이게 된다. 즉 일제에 의한 비문 변조는 1895년에서 1912년 사이에 있었던 것으로 보아야 한다.

일제는 계연수선생을 여섯 토막을 내는 육시(戮屍) 후 압록강에 던져 버린다. 일제는 독립 운동했다고 이렇게 잔인하게 토막내어 죽인 적이 없다. 당시 일제의 최고 인물인 이또오 히로부미를 사살한 안중근장군도 재판받고 처형당한다. 그런데 이렇게 육시까지 한 것으로 미루어 보아 계연수선생이 비문을 적어 놓았다는 사실을 일제가 알았던 것으로 보인다. 

일제가 비문을 어떻게 조작했는지는 아직도 연구대상이며, 한일 간 동양사학의 첨예한 대립의 장이기도 하다. 아래는 비문징실의 내용으로 빨간색 부분이 왜와 관련된 이야기로 일제가 없애버린 글자이다. 중요한 내용은 왜가 거국적으로 항복하였다는 기사가 나와 <한단고기>의 기록과 일치한다. 

▲   광개토태왕 비에 비가 내리니 석회로 조작한 곳에서 석회물이 줄줄 흘러내리고 있다.
 
(第2面9行)官兵 跡而越來攻來背 急追至任那 加羅從拔城 城卽歸服安 羅人戍兵 新羅城口城 倭滿倭潰城 (병이 왜의 자취를 밟고 넘어 급히 쫓아 임나가라에 이르러 성을 치니 성은 귀복 하였다. 아라인 수병이 "신라성"을 발하였다. 0성에 왜가 가득 있었으나 왜가 무너졌고 6성이 우리의 공격을 받아 궤멸되어 남은 것이 없었다.)

(第2面10行)被我攻口滅 無遺倭遂擧 國降死者十 之八九臣 率來安羅人 戌兵滿假口 口倭欲敢戰與喙己呑卓淳 (왜가 드디어 거국으로 항복하니 죽은 자가 십중팔구나 되었으며 신하를 모두 데리고 왔다. 아라인 수병이 가00에 가득 차 있었다.  왜가 훼기탄, 탁순의 제적과 더불어 감히 싸우고자 하여 00을 꾀하였으나 관병이 먼저 이들을 제압하여 바로 탁순을 빼앗았다.

(第3面1行) 諸賊謀口口 官兵制先直 取卓淳而佐 軍由淡路島 到但馬右軍經難波至武藏王直到竺 斯諸賊悉自潰 (이어 좌군은 담로도를 경유하여 단마에 이르고, 우군은 난파를 경유하여 무장에 이르고, 왕은 바로 축사에 도착하니, 제적이 스스로 무너졌다. 드디어 이를 군으로 삼았다.)

(第3面2行) 遂分爲郡安 羅人戌兵昔 新羅寐錦未 有身來口口 口國岡上廣 開土境好太 王口口新羅寐錦口口僕勾 (아라인 수병. 예전에는 신라 매금(임금)이 스스로 와서 조공하는 법이 없었는데, 이제 국강상광개토경호태왕 때에 이르러 신라 매금이 스스로 와서 조공하고 고구려에 복속하였다.)

▲   일제가 민족정신 말살을 위해 우리의 고대사서 20만권을 불질렀다는 신문기사

호태왕 비문의 훼손은 일제가 우리의 고대사서 20만권을 불 지르고, 중요한 사서는 일본으로 가져가는 분서갱유와 맥을 같이 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인류 문명의 시조가 되는 찬란한 문화를 꽃피웠고, 대륙을 지배했던 천자국의 천손민족(天孫民族)의 후예들을 일개 섬나라가 식민지배하기 위해서는, 그 위대했던 조상의 역사부터 말살할 필요가 있었다. 이는 일왕 특명에 의한 조선인의 민족정신 말살정책이었던 것이다.

우리의 위대했던 역사에 대해 항상 열등감이 많았던 섬나라 일본은 임진왜란 때 조선을 침략해서도 사고(史庫)를 불태우고 문화재를 가져가는 등 온갖 역사 만행을 저질렀다. 메이지유신 이후 호시탐탐 조선을 집어삼키려고 노리던 일제는 드디어 그 가능성이 보이자 미리 계획한대로 역사말살 음모부터 개시한 것으로 본다.

일제에 의해 조작된 반도사관과 임라일본부설은 이미 <한단고기>와 박창범 교수의 <삼국사기> 일식분석으로 허구임이 백일하에 명백하게 밝혀졌다. 그런데 문제는 한국의 사학계가 아직도 일제가 만들어준 반도사관에 세뇌되어 위대한 민족사를 밝힌 <한단고기>를 위서(僞書)로 몰아붙이고 있다는 것이다.

사학계는 과학적 증거와 명백한 사서의 근거를 손에 쥐어줘도 여전히 일제가 만들어준 망국과 치욕의 국사를 숭상하고 고수하고 있다. 해방 62년이 넘었건만 아직도 일제대신 우리 국민들과 학생들의 민족정신과 얼을 스스로 말살하고 있는 사학계의 이런 행위는 이제는 고쳐져야 하며 국가의 내일을 위해 민족사학과 손을 잡아야 한다. 그래야 대한민국의 희망찬 미래가 열릴 수 있기 때문이다.

다음은 ‘고구려 수도 국내성은 어디에 있었나?’가 게재됩니다. 참고로 광개토태왕 시 고구려의 영토를 상상해 보시도록 중국 지도 하나를 올려 놓습니다. 


 

▲   중국의 주요 성시. 섬서성 주변 몇개 성을 제외하고는 다 광개토태왕이 정벌한 고구려의 영토로 봐도 됩니다.

by 용파더 | 2009/07/28 17:21 | 다국시대(펌) | 트랙백 | 덧글(0)

百濟遼西經略說에 대한 考察

百濟遼西經略說에 대한 考察

 

   저    자  :  미상(?)

   목    차

   1. 머리말·························1

   2. 백제의 요서경략설 관련기사···············3

   3. 백제의 중국 진출지의 지리적 위치 ··········14

   4. 백제의 중국진출 시기와 배경 ············· 21

   5. 맺음말························26

 

1. 머리말       

《宋書》〈百濟傳〉에서 비롯되어《梁書》《南史》등의 南朝系史書에 기록된 百濟의 遼西領有에 대한 기사는 일찍이 선각들에 의하여 관심의 대상이 되어 왔다. 이들의 견해를 종합하면 백제의 요서영유 사실에 대한 긍정설,부정설그리고 百濟가 아닌 馬韓, 扶餘, 樂浪의 다른 세력이 주체였다는 견해들로 압축된다. 따라서 이러한 문제들은  백제의 대외 관계사 연구에 있어 논쟁거리가 되어 왔다.‘백제요서경략설’의 내용은 양직공도(梁職貢圖)와『양서(梁書)』,『송서(宋書)』,『남제서(南齊書)』,『통전(通典)』등의 남조계사서에 약간의 차이점은 있지만,‘진대(晋代)에 고구려가 요동을 차지하니, 백제가 요서를 차지해 진평군(晋平郡) 진평현(晋平縣)을 두었다’는 기록이 그 근거가 되고 있다.

실학자 신경준(申景濬)은 중국과 한국의 사료에 근거하여 백제가 한 때 요서와 월주 땅을 차지했다는 것은 의심할 바 없다고 하였으며, 단재 신채호(申采浩)는

중국의 사료에 근거하여 백제가 요서·산동·강소·호남 등을 차지하였을 것으로 보았으며, 정인보(鄭寅普) 역시 백제의 중국 진출 사실을 인정 하였다. 해방 이후 남북한 학계에서 김세익과 김상기(金庠基)가 비슷한 시기에 <중국 요서 지방에 있었던 백제의 군에 대하여>라는 논문과〈百濟의 遼西經略에 對하여〉라는 논문을 발표하였는데 후자가 중국 문헌에 보이는 백제의 요서 진출에 관한 기록을 상세하게 검토하여 그 사실을 확인함으로써 두 사람 모두 백제가 요서 지역에 진출하여 그곳을 지배했음을 확인하였으며, 후에 방선주(方善柱)가 그의 논문 <百濟軍의 華北進出과 그 背景〉에서 김세익과 김상기의 논리를 더욱 발전시켜 백제가 진출했던 지역은 요서에 국한된 것이 아니라 남쪽으로 산동성과 강소성에 이르렀다고 보았다.

 이상이 긍정설을 주장하는 사람들과 그들의 주장이며, 부정설을 주장하는 이들은 다음과 같은 궁색한 논리를 가지고 부정설을 펼친다.

 백제가 요서에 진출했다는 진말(晋末)에는 모용씨(慕容氏)가 요서 지방을 점유하고 있었으며,『삼국사기』등 우리 측 사서에 이에 대한 기록이 전혀 보이지 않고, 중국 측 사서 가운데서도 남조 측에만 단편적으로 보일 뿐 북조 측의 기록에 없다는  사실이 부정적인 견해를 내세우는 사람들이 내세우는 근거이다. 그러나『삼국사기』의 편찬총책임자였던 김부식이 신라계(경주 김씨)이고, 그와 함께『삼국사기』편찬에 참여한 사람들이 그의 동문이거나 후배였던 것을 감안할 때 고구려나 백제에 대해 유리한 기록을 가능한 삭제하는 과정에서 백제의 요서경략이 빠졌다고 볼 수 있으며 뒤에서 다시 언급하겠지만 중국의 25사 중 남조계사서와 북조계사서에 직·간접으로 백제의 요서경략에 대한 기록을 남겨 두고 있어서 삼국사기에서 엿보이는 백제의 요서경략관련 기사를 보충해 주는 것을 볼 때  부정설은 더욱 그 근거가 희박하다. 이 점은 <백제 대륙 진출설의 제문제>라고 하는 논문을 쓴 강종훈(姜鍾薰)도 '이른바 요서진출설의 경우 직접적인 관계사료의 존재를 무시하기 어렵다'고 이야기하고 있는 것에서도 알 수 있다. 또한 그는 최초의 관계기사를 전하고 있는『宋書』는 송이 멸망한 지10년이 채 안 된 시기인 南齊 武帝 永明 6년(488) 沈約에 의해 편찬된 것이라는 점과 따라서 『송서』의 내용은 서술대상시기와 편찬시기의 격차가 크지 않다는 점에서 상당한 사료적 가치를 인정할 수 있다고 하였으며, 특히 그 백제전은 현존하는 중국 역대 정사류에서는 최초로 입전되어 있는 것으로서 前代 사실의 단순한 답습이나 재구성이 아니라는 점에서 주목할 필요가 있다고 하였으며 백제전의 내용은 대부분 백제와 송 사이의 활발한 使臣 왕래를 통해 얻어진 當代의 지식에 기반한 것이므로『宋書』가 편찬될 시기에 남조의 史臣이 백제에 대해 터무니없이 잘못된 인식을 가지고 있었을 가능성은 상당히 낮다고 보는 편이 타당할 것이라고 이야기하고 있다. 그렇다면 지금까지 부정설을 주장해온 논자들은 직접적인 관계사료조차 무시하는 역사가로서는 도저히 용납할 수 없는 오류를 범한 것이다. 특히『송서』를 비롯한 남조계사서의 편찬자들의 백제에 대한 인식이 잘못된 것이었다는 주장은 부정설을 주장하는 논자들의 주된 주장이었다. 그러나『송서』의 편찬자 심약이『송서』를 편찬한 시점을 간과한 것이 부정설을 주장한 논자들의 또 하나의 치명적인 오류이다.

 더불어 상고해 보건대 중국이라는 나라의 역사는 이민족의 통치사라 해도 과언이 아니며 한족들은 자신들을 지배한 이민족이 세운 나라의 역사도 기록하였다.(예:북위의 역사를 기록한 위서, 금나라의 역사를 기록한 금사) 만약 백제가 요서를 지배하지 않았다면 굳이 중국의 남조계 사서에서 백제가 요서에 군과 현을 두었다고 하는 기록이 있을 까닭이 무엇이며 그 군과 현의 이름까지도 기록되어 있을 까닭은 무엇인가? 이것은 백제의 요서경략이 사실임을 증명하여 주는 중요한 증거이다. 또한 북조계 사서에서도 남조계사서의 기록을 뒷받침하는 기록이 나오는 것으로  보아 부정설은 그 근거가 매우 빈약하기 짝이 없다. 뒤에 자세히 언급하겠지만『삼국사기』최치원전에 실린 상태사시중장은 『삼국사기』등 우리측 사서에 백제가 요서를 영유하였다는 기록이 없다는 기록을 전면적으로 부정하게 해주는 귀중한 자료이다. 따라서, 본인은 긍정설의 입장에서 백제요서경략설에 대해 살펴보고자 하는 바이다.

 

2.백제의 요서경략설 관련기사

『양직공도(梁職貢圖)』

 백제는 예부터 내려오는 동이의 마한에 속한다. 진(晋)말기에 구려(句麗)가 요동을 차지하니, 낙랑(樂浪) 역시 요서 진평현(晋平縣)을 차지하였다.

百濟舊來夷馬韓之屬 晋末駒麗略有遼東 樂浪亦有遼西晋平縣

『송서(宋書)』  

백제국은 본래 고구려와 함께 요동의 동쪽 천 리에 있었다. 후에 고구려는 요동을 침략하고 백제는 요서를 경략해서 차지하였다.

백제가 다스린 곳은 진평군 진평현이라 한다.

百濟國本與高驪俱在遼東之東千餘里 其後高驪經略有遼東 百濟經略遼西

百濟所治謂晋平郡  晋平縣  

『양서(梁書)』

 백제는 원래 고구려와 더불어 요동의 동쪽에 있었는데 진(晉)나라 때 고구려는 이미 요동지방을 차지하였고 백제는 요서와 진평 두 지방을 점거하고 백제군을 설치하였다.

基國本與句驪在遼東之東 晋世句驪旣略有遼東 百濟亦據有遼西晋平二郡之矣 自置百濟郡

『남사(南史)』

백제는 원래 고구려와 더불어 요동의 동쪽에 있었는데 진(晉)나라 때 고구려는 요동지방을 침략하였고, 백제는 요서와 진평 두 지방을 점거한 다음 스스로 백제군을 설치하였다.

基國本與句麗在遼東之東千餘里 晋世句驪旣略有遼東 百濟亦據有遼西晋平二郡地矣 自置百濟郡

『통전(通典)』

 晉시대에 구려(高句麗)가 이미 요동을 침략하여 소유하였는데 ,백제 또한 遼西·晉平 두 郡에 웅거하였다.

『양직공도(梁職貢圖)』,『양서(梁書)』,『남사(南史)』,『송서(宋書)』의 내용을 보면 백제가 고구려와 같은 시기에 요서로 진출한 것과 백제가 지금 우리가 아는 위치가 아닌 요동의 동쪽 천리되는 지점에 있었다고 한다.(여기서의 요동은 지금의 요동과 다르다)

그리고《삼국사기》최치원전에 실린 상태사시중장은 내용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은 내용이 나온다.

고(구)려와 백제는 강성했을 때 강한 군사가 1백만 명이어서 남쪽으로는 吳와 越을 침공하고 북쪽으로는 (중국 북부의) 幽·燕·濟·魯 등의 지역을 흔들어서 중국의

큰 두통이 되었으며, 隨의 황제가 세력을 잃은 것은 저 요동(지금의 요서)을 정벌했기 때문이다.

 

이 글은 백제의 요서경략에 대해서 최치원과 그 당시 신라인들도 잘 알고 있었음을 암시한다. 그리고 고구려와 백제가 전성기 때 강병 1백만을 보유했다는 것은 고구려의 전성기 때 정복활동을 생각한다면 최치원의 이 글은 충분히 납득이 간고도 남음이 있다.

 또한 삼국사기 최치원전 중 上太師侍中狀의 내용에서 백제가 요서에 진평군을 설치하였으며 제·노·오·월에 큰 영향력을 행사했음을 알 수 있는 근거는 다음과 같다.

《남제서》에는 당시 백제가 임명한 여러 태수들의 관할 지명과 작위가 상세하게 기록되어 있는데, 그 내용을 보면 모두 하북성에서 산동성을 거쳐 양자강에 이르는 지명들로서, 그 가운데 일부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광양廣陽·조선朝鮮·대방帶方·낙랑樂浪·청하淸河·성양城陽·광릉廣陵‥‥‥.』

 

 여기서 광양과 조선은 하북성 일대를 말하며, 대방, 낙랑, 청하는 하북성 및 산서성과 선동성의 경계를 말한다. 그리고 성양은 산동성 남단을, 광릉은 양자강 북쪽의 강소성 일대를 가리키는데, 모두 공인된 지명들이다.

 이러한 고대의 지명들은 중국의 역사지도에도 대부분 표기되어있는 것들이다. 특히 이러한 사실을 기록하고 있는《남제서》는 중국의 다른 사서들과 달리 남북조시대 당대에 편찬된 문헌이라는 점에서 그 가치가 매우 크다. 우리나라의 정사 중 하나인《삼국사기》에서도 백제의 요서 진출을 비롯한 중국진출에 대해 언급하고 있으나 자세히 살펴보지 않으면 그냥 지나치게 된다.

 여기서 다시금 생각해볼 문제는 중국의 남조계 사서에만 유독 백제의 요서 진출에 관하여 언급이 되어있다는 점이다. 그러나 이른바 남조는 한족이 세운 정통왕조이고 북조는 비한족이 세운 비정통왕조라는 점에서 보면 남조의 사서가 북조의 사서보다 정통성에서 앞선다고 할 수 있다. 또한 북위가 강성했다고 하나『삼국사기』의 백제본기 동성왕 10년(488년)기사에‘위나라가 우리를 침공하였으나 우리 군사가 그들을 물리쳤다’라는 짧은 기록을 보아도 최치원이 말한 대로 백제가 전성기에 강병1백만을 보유하기에 부족함이 없었으며 그 군사력을 토대로 제·노·오·월에 영향력을 끼칠 만한 역량이 있었음을 의미한다. 더욱이 동성왕과 무령왕대에는 중흥기였던 것을 상기해보면 최치원이 한 말이 크게 과장되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삼국사기』의 편찬자들은 중국 대륙 북방을 장악하고 있던 위나라가 바다 건너 한반도에 위치한 백제를 침략했다는 기록에 당혹스러워 하였을 것이다.

 더욱 이들을 당혹스럽게 만든 기록은 우리나라의 사서가 아닌『남제서』의 기록이다.

 

위나라 오랑캐가 기병 수십만을 일으켜 백제를 공격하였는데, 그 경계 안으로 들어가니, 모대가 장군 사법명, 찬수류, 해례곤, 목간나를 보내 군대를 통솔시켜, 오랑캐의 군사를 기습하여 크게 물리쳤다.

 

 수군도 아닌 기병이, 그것도 수십만이 백제를 쳐들어왔다면, 그것은 필시 대륙 안에서 벌어진 사건이다. 더욱이 북위의 군사제도는 기병을 중심으로 한다. 그렇다면 중국 대륙에 백제의 땅이 있었다는 뜻인데,『삼국사기』편찬자들은 그 사실을 인정하지 않았다. 때문에『삼국사기』편찬자들은 490년에 일어난 이 사건에 대한 기록을 잘못된 것으로 보고, 아예 삭제해버렸다. 그러나 다행스럽게도『양직공도(梁職貢圖)』,『송서(宋書)』,『양서(梁書)』,『남제서(南齊書)』,『남사(南史)』,『통전(通典)』에 백제의 중국진출과 그 범위에 대해서 언급되어 있으며『삼국사기』의 최치원전에서도 지금의 요서인 그 당시의 요동에 백제가 진출하였던 것을 언급하고 있다.

 하지만『남제서』는 당시의 일을 동성왕이 건무2년(495년)에 올린 다음 표문을 통해 잘 알려주고 있다.

 

 신은 예로부터 책봉을 받고 대대로 조정의 영예를 입으며, 분에 넘치게도 하사하신 부절과 도끼를 받아들고 여러 제후들을 극복하여 물리쳤습니다. 지난번 저근 등이 나란히 관작을 제수받는 은총을 입은 것으로 신과 백성들이 함께 기뻐하였습니다. 지난 경오년(490년)에 험윤이 회개하지 않고 병사를 일으켜 깊숙이 핍박하여 들어왔습니다. 신이 사법명 등을 보내

군대를 거느리고 그들을 맞아 토벌하매, 밤중에 불시에 공격하여 번개같이 들이치니, 흉노의 선우가 당황하여 무너지는 것이 마치 바닷물에 쓸려 내려가는 것 같았습니다. 적이 패주하는 기회를 타고 추격하여 머리를 베니,

들녘은 엎어진 주검으로 붉게 물들었습니다.

 

 동성왕의 표문은 이처럼 당시 상황을 생생하게 그려내고 있다. 이때 쳐들어온 위나라의 군대를 수십만 기병이라고 명시한 것은『남제서』의 편자들이었고, 동성왕의 표문은 그저‘험윤이 병사를 일으켜’라고 담담하게 표현하고 있다. 즉, 동성왕의 표문에서는 위나라 병력에 대해 부풀리지도 않았고, 상황을 과장하지도 않았다는 뜻이다.

 표문에서 드러나는 또 하나의 사실은 이 때의 위나라의 침입은 한차례만 있었던 것이 아니었다는 점이다. 표문에서‘험윤이 회개하지 않고 병사를 일으켜’라는 부분과‘지난번 저근 등이 관작을 제수받은 은총을 입은 것으로’라는 부분이 그 점을 증명해주고 있다. 전자는 험윤이 이미 첫 침입에서 패배했는데도 반성하지 않고 또 침입을 감행했다는 뜻이며, 후자는 이 때 첫 침입을 막아낸 장수가 저근이었다는 사실을 명시하고 있다. 이는『삼국사기』동성왕 10년(488년)의‘위나라가 우리를 침입      했으나 우리 군사가 그들을 물리쳤다’는 내용이『남제서』490년 경오년의 기록과 중복되는 것이 아님을 증명한다. 즉, 위나라의 백제에 대한 공격은 488년과 490년, 두 차례에 걸쳐 이뤄졌다는 것이다.

 동성왕이 표문을 올린 목적은 490년 전쟁에서 공을 올린 장수들에게 남제의 황제가 직접 관작을 제수하도록 하기 위함이었다. 그래서 이렇게 말하고 있다.(495년 표문)

 

지금 나라가 고요하고 평온한 것은 사법명 등의 책략이 결실을 맺은 것이니, 그 공훈을 찾아 마땅히 기리고 드러내야 할 것입니다. 이제 사법명을

행정로장군매라왕으로 임시하고, 찬수류를 행안국장군벽중왕으로 삼고, 해례곤을 행무위장군불중후로 삼으며, 목간나는 앞서 군공이 있는데다 또한 누선을 쳐 빼앗았으니 행광위장군면중후로 삼았습니다. 엎드려 원하건대 천자의 은혜로 특별히 가엾게 여기시고 청을 들어 제수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신이 보낸 행용양장군 낙랑태수 겸 장사 신 모유와 행건무장군 성양태수 겸 사마 신 왕무 및 겸참군행진무장군 조선태수 신 장색, 그리고 행양무장군 진명 등은 관직에 있으면서 사사로움을 잊고 오로지 임무를 공변되게 하며, 위태로움을 보면 목숨을 바치고 어려움을 이행함에 뒤를 돌아보지 않습니다. 이제 신의 사신으로 임명함에 거듭되는 험난함을 무릅쓰고 다니며 지극한 정성을 다하였습니다. 진실로 마땅히 관작을 올려줘야 함에 각기 행(行)으로 임명하여 임시합니다. 엎드려 원하건대, 조정에서 특별히(정식으로) 관작을 제수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이 내용에서도 위나라의 침입이 처음이 아니었음을 알게 해 주는 대목이 있는데, ‘목간나는 앞서 군공이 있는데다'라는 부분이 그것이다. 즉, 목간나도 저근과 함께 위나라의 1차 침입을 막아낸 장수라는 것이다. 또한 목간나가 위나라의‘누선을 쳐 빼앗았다’는 것은 위나라가 수군도 동원했다는 사실을 밝혀주고 있다.

 동성왕이 올린 관작에는 모두‘행(行)’자가 붙어 있는데, 이는 임시직책이라는 뜻이다. 즉, 관작은 남제의 황제가 내리는 것이므로 동성왕이 관작을 확정할 수 없기에‘행’을 붙여 임시직으로 삼고, 임시직으로 올린 그 관작을 정식으로 인정해 달라는 요구이다. 남제의 황제는‘조서로써 허락하고 나란히 군호를 하사하였다’고 『남제서』는 기록하고 있다.

『남제서』에 수록된 동성왕이 490년에 올린 표문은 488년에 쳐들어온 북위의 군대를 물리친 장수들에 대해 관작을 요청하는 내용이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490년 표문:(전반부결문)  공로와 근면함에 보답하고자 실로 그 이름을 열거하여 보존하려 합니다. 가행영작장군 신 저근 등 네 사람은 힘을 다하여 충성함으로써 나라의 어려움을 떨쳐버렸으며, 뜻과 용기에 과단성이 있고 명장의 위세에 견줄 만합니다. 국가의 성곽이며 사직을 지키는 견고한 보루라 할 만하기에 공로를 논하고 노고를 헤아림에 있어 마땅히 드러내는 것이 있어야 할 것입니다. 이제 전례에 의거하여 함부로‘행’의 직책을 임시로 주었습니다. 엎드려 바라건대, 은혜로써 가엽게 여기시어 임시한 바를 제수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영작장군면중왕 저근은 시대의 급무에 조력을 다하였으며, 아울러 무공도 뛰어나기에 이제 행관군장군도장군도한왕으로 임시합니다. 건위장군팔중후

여고(餘古)는 약관의 나이로 보좌하며 충성된 공적이 일찍이 널리 알려졌 으니, 이제 행녕삭장군아착왕으로 임시합니다. 건위장군 여력은 충정과 정성이 서로 어울리매 문무의 공덕이 함께 드러나니, 이제 행용양장군매로   왕으로 임시합니다. 광무장군 여고(餘固)는 시대의 급무에 충성을 다하였

으며 국정을 크게 베풀었으니, 이제 행건위장군불사후로 임시합니다.

 신이 보낸 행건위장군 광양태수 겸 장사 신 고달과 행건위장군  조선태수 겸 사마 신 양무 및 행선위장군 겸 참군 신 회매 등 세 사람은 지조와 덕행이 맑고 밝으며 충정과 정성이 이미 널리 알려졌습니다. 지난 태시(461∼471년)중에 송의 조정에 여러 번 사신으로 갔었으며, 지금 신의 사신으로 임명하매 거듭되는 험난한 여정을 무릅쓰고 다니며 좋은 결과에 이르도록 하니, 마땅히 작위를 올리고 삼가 선례에 의거하여 각기‘행’의 직책으로 임시 합니다.

 더욱이 오묘한 은택과 영험한 안식은 만리 밖에서도 바라는 바인데, 황차 천자의 뜰에 가까이 있으면서 어찌 은혜를 입고 의지하려 하지 않겠습니까? 엎드려 원하건대, 제(帝)께서 살피시고 특별히 가엽게 여기시어 (정식으로) 제수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고달은 변방의 임무에서 그 정성이 일찍이 널리 알려졌으며, 공무에 힘써

노력하니 이제 행용양장군 대방태수로 임시 합니다. 양무는 지조와 덕행이 많고 전념하여 공무를 게을리 하지 않으니, 이제 행건위장군 광릉태수로 임시합니다. 회매는 뜻을 지키매 빈 구석이 없고 힘써 좋은 결과에 누차 이르니, 이제 행광무장군 청하태수로 임시 합니다.

 

이제 남제가 위의 표문애 대해 어떻게 반응하였는지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동성왕 표문에 대한 남제 무제의 조치:조서를 내려 허락하여 나란히 군호를 하사하고 태수로 제수하였다. (백제) 왕은 사지절도독백제제군사진동대장군으로 삼았다. 사신 겸 알자복야 손부가 천자의 명으로 모대에게 죽은 조부 모도의 관작을 답습하게 하여 백제왕으로 삼았다. 이르기를‘오호라

 오로지 이 시대에 충절을 이어받아 멀리까지 정성을 드러내니, 큰 바닷길은 삼가 맑으며 조공의 맹세는 쇠퇴한 적이 없도다. 통상의 법전에 따라 귀한 관작을 계승하게 할 것이다. 그 위업을 삼가 이어받았으니, 어찌 신중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제서를 내려 행도독백제제군사진동대장군백제왕

 모대를 이제 조부 모도의 관작을 답습하게 하여 백제왕으로 삼고, 즉위의 인장과 인끈 및 옥과 구리와 호랑이 가죽과 대나무로 된 네 개의 책자를 내리노라. (백제) 왕이 이를 공경하여 삼가 받으면 또한 경사스럽지 않겠는가.’하였다.

 

남제의 무제는 동성왕의 요구를 들어주었다. 동성왕의 표문들은 공손하게 예를 차린 듯 보이지만 잘 살펴보면 무력으로 남제를 칠 수 있음을 암시하고 있다.

또한 동성왕은 488년부터 495년까지의 기간을 지금 우리가 알고 있는 백제에서 머무르며 통치한 것이 아니고 요서·진평에서 통치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한 증거는 첫째,『삼국사기』백제본기 동성왕 10년(488)의 위나라의 침략을 격퇴한 기사 둘째,『남제서』에 실려 있는 동성왕이 남제에 올린 490년의 표문에서‘더욱이 오묘한 은택과 영험한 안식은 만리 밖에서도 바라는 바인데, 황차 천자의 뜰에 가까이 있으면서 어찌 은혜를 입고 의지하려 하지 않겠습니까?’ 라는 구절은 그가 한반도에 있는 백제에 있지 않았다는 것을 의미한다.

 지금까지는 중국의 남조계 사서들과『삼국사기』에만 백제의 요서경략과 관계된 기사가 있는 줄 알았으나 그것이 아니었다.

 우선《진서》〈동이열전〉에는 마한전과 진한전이 있을 뿐 백제전은 없다. 따라서 晉나라는 백제에 대한 지식이 없었던 것으로 오해할 수 있으나 그렇지 않다.《진서》의 本紀에 해당하는〈帝紀〉에는 백제와 사신 왕래를 했던 기록이 있다. 서기 372년(咸安 2년), 373년(寧康 1년), 384년(太元 9년), 386년(太元 11년), 416년(義熙 12년)에 백제와 진나라 사이에는 사신의 왕래와 무역이 있었던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이로 보아 진나라에서는 백제에 대한 정보를 가지고 있었던 것인데도《진서》에는 백제전이 없는 것이다. 따라서, 의도적으로 빼어버린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그러나 백제의 중국 진출을 알 수 있는 간접적인 기록들은 발견된다.

 위에 든 백제와 진나라의 사신 왕래 기록 가운데 서기 372년의《진서》기록에는 진나라에서 사신을 보내 백제 왕 餘句(近肖古王)를 鎭東將軍으로 삼고 樂浪太守를 거느리도록 하였다고 되어 있다. 낙랑군은 원래 지금의 난하 동부유역에 있었으나 고구려 미천왕에게 축출되자 慕容 가 그 유민을 모아 營州 서남에 낙랑의 僑郡을 설치하여 살도록 하였다. 그러므로 이 시기에 ,낙랑군은 지금의 난하 서쪽에 있었다. 그러한 낙랑군의 태수를 백제 왕에게 거느리도록 했다는 것은 그 당시에 백제가 지금의 난하 서부지역을 다스리고 있었음을 알게 해주는 것이다. 진나라에서 백제가 그 지역을 다스리고 있는 현실을 인정한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晉書》〈載記〉에는 慕容 의 記室參軍 封裕가 한 말 가운데 다음과 같은 내용이 있다. "고구려·백제 및 宇文·段部의 사람들은 모두 군사력에 변화가 있는데, 그들은 중국처럼 의리를 생각하면서 오늘에 이른 것이 아니기 때문에 모두가 우리에게 귀의하려는 생각이 마음에 있다"는 것이다. 봉유는 당시 모용씨를 둘러싸고 있는 주위의 여러 정치세력들에 대해서, 그 세력들은 약화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의리를 모르기 때문에 자신들이 유리할 것이라고 말함으로써 모용황을 안심시키고 있는 내용인 것이다.

 당시에 고구려·우문씨·단부 등은 모용씨와 접경하고 있었던 모용씨의 강한 적대세력이었다. 그런데 봉유의 말 가운데는 그러한 세력 가운데 백제도 포함되어 있다. 만약 백제가 바다 건너 한반도 남부에 있었다면 모용씨가 걱정할 세력이 아니었을 것이다. 이로 보아 백제는 중국 북부의 모용씨와 가까운 지역에 영토를 가지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자치통감》〈진기〉에는 서기 346년에 鹿山에 있던 부여가 백제의 침략을  받아 서쪽으로 이주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백제가 한반도 남부에만 있었다면 이 기록의 내용을 합당하게 설명할 수가 없다. 당시에 부여는 두 곳에 있었는데 하나는 길림성 북부와 내몽고자치구 동부 및 흑룡강성을 차지하고 있었고, 다른 하나는 난하 상류유역에 있었다. 그러므로 위의 내용은 백제가 고대의 요서, 즉 지금의 난하 유역에 있었던 자기 영토에서 난하 상류유역에 있었던 부여를 동남쪽에서 공격했다고 보면 합리적으로 설명된다. 이로써 백제는 고대의 요서, 즉 지금의 난하 유역에 영토를 가지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지금까지 고찰한 바와 같이《晉書》에는 백제전이 없을 뿐만 아니라 백제의 중국 진출에 관한 직접적인 기록은 보이지 않지만 백제의 중국 진출을 확인할 수 있는 간접적인 기록들은 보이고 있다. 따라서 주의를 기울이지 않으면 백제의 요서경략은 허구라고 주장할 여지가 충분하다.

 남북조시대의 북조였던 북위의 역사서《魏書》에는 百濟國傳이 있으나 그 내용은 백제의 蓋鹵王이 북위에 보낸 국서와 그에 대한 답신이 거의 전부를 차지하고 있고 백제의 중국 진출에 대해서는 전혀 언급이 되어 있지 않다. 더욱이 앞에서《남제서》백제전과《삼국사기》〈백제본기〉를 통해서 확인된 백제와 북위의 전쟁에 대해서도 한 마디 언급이 없다.

 개로왕의 국서는 백제와 고구려의 전쟁에 북위가 백제와 연합해 줄 것을 요청한 것이므로 북위의 권위를 한껏 인정한 것이니 북위로서는 매우 흡족한 내용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백제의 중국 진출이나 북위가 백제에게 패한 전쟁은 북위로서는 명예롭지 못한 사건이 아닐 수 없다. 이로 보아 북위에 불리한 내용은 제외했던 것으로 생각된다.

 그러나《위서》에서도 백제가 중국에 진출해 있었을 가능성을 보여주는 간접적인 기록은 보인다. 勿吉國傳의 내용을 보면,

 

 太和(서기 477∼499년) 초에 또 말 5백 필을 바쳤다. …… (勿吉國은) 스스로 말하기를, 그 나라에서 먼저 고구려 마을 열 곳을 격파하고 은밀히 백제와 더불어 水路를 따라 힘을 합쳐 고구려를 취할 것을 꾀하려고 하는 데 乙力支를 大國에 사신으로 보내 그것이 옳은지 그 논지를 묻고자 한다.

 

고 하였다. 勿吉이 백제와 함께 고구려를 치려고 하는데 그것이 옳은지 아닌지를 乙力支를 사신으로 파견하여 북위의 의견을 묻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물길은 백제와 함께 고구려를 치는 데 수로를 이용하려 하고 있다고 말하고 있다.

 당시 물길의 위치는  고구려의 북쪽으로서 지금의 연해주 지역이었다. 을력지는 북위에 이르는 데 그의 나라를 출발하여 배를 타고 난하를 거슬러 서쪽으로 오르다가 太 河에 이르러 배를 물 속에 감추어두고 남으로 육로를 걸어서 洛孤水를 건너 거란의 서쪽 국경을 따라 和龍에 이르렀다고 말하고 있다.

 이러한 내용으로 보아 물길의 남쪽에는 고구려가 있었음이 분명하므로, 한반도 남부에 있었던 백제와 연합하여 수로를 이용하여 고구려를 치기 위해서는 동해로 신라의 해안을 거쳐야 한다. 그것은 쉽지도 않겠지만 고구려의 동부는 산악지역이어서 전략적으로 별 가치가 없다. 따라서 물길과 백제가 연합하여 치려고 했던 고구려 지역은 전략적으로 가치가 있는 고구려의 서부이거나 발해 북쪽 연안이었을 것이다. 이렇게 보면 백제가 한반도 남부에서 군대를 움직이기보다는 고구려 서쪽의 요서 지역에 백제 영토가 있어 그 군대를 움직일 계획이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북위가 분열하여 일어난 북제의 역사서인《북제서》後主紀에도 백제가 중국에 진출하였음을 간접적으로 말해 주는 기록이 있다. 武平 2년(서기 571년)條에,

 

봄 정월 …… 戊寅에 백제의 왕 餘昌을 使持節·都督·東靑州刺史로 삼았다.

 

는 기록이 보인다.《삼국사기》〈백제본기〉위덕왕 17년조에도 이와 같은 내용이 실려 있다. 使持節은 황제의 신임표시인 符節을 소유했다는 뜻이며, 都督은 군사의 최고 책임자이고 刺史는 행정의 최고 책임자이다. 그러므로 위의 내용은 북제가 백제의 위덕왕에게 東靑州의 군사와 행정의 대권을 맡겼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관직은 중국 영역 안의 관직으로서 영역 밖에서는 사용되지 않았다. 그러므로 동청주는 중국 안에서 찾아야 한다. 동청주는 지금의 산동성 동남부로서 그 治所는 膠州灣 안에 있는 不其城이었다. 이곳은 현재 광역의 청도시 지역으로서 해로의 요충지이다. 이러한  중요한 지역의 문무대권을 백제왕이 장악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것은 백제가 해상활동을 활발하게 했음을 말해주는 것이기도 하고, 그 이전부터 중국 지역에 진출해 있었다는 사실을 간접적으로 말해주는 것이기도 하다. 북제는 그러한 현실 상황을 인정하였던 것이다.

 이상과 같이 북조의 역사서들은 남조의 역사서들처럼 백제의 중국 진출을 직접 말하지는 않았지만 그러한 사실을 시사하는 간접적인 기록은 여러 곳에서 확인된다. 이러한 남조와 북조 역사서들의 기록을 종합해 볼 때 백제의 중국 진출은 움직일 수 없는 사실이었음을 알 수 있다.

 

3. 백제의 중국 진출지의 지리적 위치

앞에서 사료를 통해서 살펴본 바와 같이 백제가 중국에 진출하였다면 그 지리적 위치는 어디였을까?《송서》백제전에는 백제가 진출했던 곳을 요서군 지역이었다고 말하면서 그곳을 晉平郡 晉平縣이라 불렀다고 하였다. 그러나 백제가 진출했던 요서군이 어느 시대의 요서군 인지를 밝히지 않고 있다. 이 요서군의 위치를 오늘날의 요서 지역으로 단정해서는 안 될 것이다. 왜냐하면 중국 역사상 행정구역은 여러 번에 걸쳐 바뀌었기 때문이다.(우리나라의 경우에도 행정구역이 바뀌지 않았는 데 지명이 바뀌는 예는 없다고 봐도 과언이 아니다)

 그런데《송서》백제전과 거의 같은 내용을 싣고 있는《양서》백제전에는, 백제가 晉시대에 遼西·晉平 두 郡을 소유하여 스스로 백제의 군을 설치하였다고 하였다. 이 기록에 따르면 백제가 진출했던 지역은 진시대의 요서군과 진평군이었다는 것이 된다. 그런데《진서》〈지리지〉에는 요서군은 보이지만 진평군은 보이지 않는다. 진평군은 다른 이름이 잘못 기록된 듯하다.

 진평군에 관한 기록은 보이지 않으므로 이를 확인하는 문제는 뒤로 미루기로 하고 우선 요서군에 관한 기록을 보자. "요서군은 秦帝國에서 설치하였는데, 3개의 縣을 거느린다"고 말하고는 陽樂·肥如·海陽 등의 현이 있다고만 하였을 뿐 더 이상 자세한 정보는 제공하지 않고 있다. 그러나 이 기록에 따르면 晉시대의 요서군은 晉帝國에서 설치한 것이므로 晉帝國시대로부터 晉나라에 이르기까지 그 위치가 변하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이를 확실히 하기 위하여《위서》〈지형지〉를 보면 요서군에 대해서《진서》〈지리지〉와 마찬가지로, 진제국에서 설치했는데 3개의 현을 거느린다고 말하고는 비여·양락·해양 등의 현 이름을 들고 있다. 이들 현 가운데 비여현에 대해서,

 

肥如縣은 兩漢시대부터 晉시대에 이르기까지 (요서군에) 속하였다. 孤竹山祠·碣石·武王祠·令支城·黃山·濡河가 있다.

 

고 하였다. 위의 기록들을 동해 볼 때 요서군은 秦帝國에서 설치하였는데, 西漢시대부터 晉나라에 이르기까지 그 위치에 변화가 없었다.

 위의 내용 가운데 비여현에 있는 孤竹山祠·碣石·濡河 등은 그 위치가 이미 확인되어 있다. 고죽산사는 孤竹國의 사당일 것인데 고죽국은 지금의 난하 유역에 있었고, 갈석은 난하 동부유역에 있는 산의 이름이며 유하는 일반적으로 濡水라 불렸는데 난하의 옛날 이름이었다. 이로 보아 진시대의 요서군은 지금의 난하 유역에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이를 다시 한 번 확인하기 위하여《한서》〈지리지〉를 보면, 요서군은 진제국에서 설치하였는데 且憲·海陽·新安平·柳城·令支·肥如·寶從·交黎·陽樂·狐蘇·徒河·文成·臨 ·   등 14개의 현이 있었던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그리고 위의 현들 가운데 海陽縣에 대해서는 龍鮮水가 있는데 동쪽에서 封大水로 들어간다 하였고, 新安平에 대해서는 夷水가 있는데 동쪽에서 塞外로 들어간다고 하였으며, 令支縣에 대해서는 孤竹城이 있다고 하였고, 肥如縣에 대해서는 玄水가 있는데 동쪽에서 濡水로 들어간다고 하였다.

 위의 내용에서 몇 가지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우선 신안평현에 있는 이수가 동쪽에서 塞外로 들어간다 하였으니 서한시대의 요서군은 국경지대에 있었음을 알 수 있다. 塞는 국경에 설치된 요새를 말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영지현에 고죽성이 있다 하였는데 앞에서 말한 바와 같이 고죽국은 지금의 난하 유역에 있었다. 따라서 요서군의 영지현은 북경 근처에 있는 지금의 난하 유역에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또 해양현에는 용선수가 있는데 동쪽으로 흐른다 하였고, 비여현에는 현수가 있는데 동쪽에서 유수로 들어간다 하였는데,《水經注》〈濡水〉條에 따르면 용선수는 유수의 지류였다. 그러므로 용선수와 현수가 있었던 해양현과 비여현은 유수의 서부유역에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유수는 앞에서 말했듯이 난하의 옛 이름이었다.

 이상의 내용을 종합해 보면 서한부터 晉나라에 이르는 시기의 요서군은 지금의 난하 유역에 있었는데 그 대부분 지역은 난하 서부유역이었음을 알 수 있다. 秦帝國과 서한시대에 난하 하류유역에는 요동군이 있었는데 그 동쪽 경계는 갈석산이었다. 그리고 요동군의 서북쪽에 요서군이 있었다. 그런데 앞의 인용문에 따르면 晉나라의 요서군 비여현에 갈석이 포함되어 있다. 이로 보아 서한에서 晉애 이르는 시기에 요서군의 위치는 변화가 없었지만 그 범위는 다소 변화가 있었던 듯하다.

 지금까지 확인한 것처럼 백제가 진출했던 요서군은 지금의 난하 서부유역이었다. 그러나 진평군애 관해서는 그 자체에 대한 기록이 없으므로 위치를 확인할 길이 없다. 이를 보완할 수 있는 기록이《통전》에 보인다.

 백제의 중국 진출에 관한 기록이 唐시대에 杜佑가 편찬한《통전》백제조에도 실려있음을 앞에서 말하였는데, 거기에는 진시대에 백제가 요서·진평 두 군에 웅거하였다고 말하고는 그 위치에 대해서 주석하기를, "지금의 柳城과 安平 사이"라 하였다. 그리고《문헌통고》에서도 그 위치를 "唐시대의 柳城과 北平 사이"라 하였다. 그러므로 당시대의 유성·안평·북평의 위치를 확인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通典》〈州郡〉條를 보면 유성군에 대해서.

 

동쪽으로 遼河까지는 4백80리이고, 남쪽으로 바다까지는 2백60리이며, 서쪽으로 北平郡까지는 2백 리이고, 북쪽으로 거란의 경계까지는 50리이다.

동남으로 安東府에 이르는 데 2백 70리이고. 서남으로 북평군에 이르는 데

3백70리이다.

 

라고 하였고 북평군에 대해서는,

 

동쪽으로 柳城郡까지는 7백 리이고, 남쪽으로 바다까지는 1백리이며, 서쪽으로 漁陽郡까지는 3백 리이고, 북쪽으로 국경까지는 1백80리이다. 동남쪽으로 臨楡關에 이르는 데 1백80리이고, 서남쪽으로 馬城縣에 이르는 데 1백 80리이며, 서북으로 石城縣에 이르는 데 1백40리이고, 동북으로 柳城郡에 이르는 데 7백 리이다.

 

라고 하였다. 유성군과 북평군은 요하에서 서쪽으로 4백80리 밖에 있었는데, 지금의 북경 가까이에 있었단 어양군으로부터 멀지 않은 곳이었다. 안평은 深州에 속해 있었던 현 이름인데, 심주는 戰國시대에는 조나라와 진나라에 속하여 上谷郡과 鉅鹿郡의 땅이었고 西漢시대에는  郡의 땅이었다고 하였다. 그곳은 지금의 하북성 안평 지역이었다.

《신당서》〈지리지〉를 보면 유성군에는 현이 유성현 하나밖에 없었는데 그 위치에 대해서,

 

柳城縣은 중앙에 위치하여 서북쪽은 奚와 접하였고, 북쪽은 거란과 접경하였으며, 東北鎭의 醫巫閭山祠가 있고, 또 동쪽에는 碣石山이 있다.

 

고 하였는데, 갈석산이 난하 동부유역에 있음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통전》인용문 내용 가운데 유성군과 북평군의 거리에 대해서 柳城郡條에서는 2백 리와 3백70리라 하였는데 北平郡條에서는 7백 리라 하여 상당한 차이를 보이고 있다. 그러한 차이는 唐시대에 행정구역 개편이 있을 때, 그 전과 후의 각각 다른 시기의 거리를 기록했기 때문인 것으로 생각된다.

 위의 기록들을 종합해 보면 유성군은 지금의 요하에서 서쪽으로 4백80리 떨어져 있었고, 동쪽에 갈석산이 있었으므로 그 위치가 지금의 난하 유역이었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북평군은 유성군에서 서쪽으로 수백 리 떨어진 곳에 있었다. 따라서《통전》과《문헌통고》에 기록된 백제의 진출지역은 지금의 난하 유역에서 서쪽으로 하북성 중부에 이르렀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러면《송서》와《양서》의 백제전에 요서군과 함께 언급된 진평군은 당시의 행정구역에 보이지 않는데 어느 곳을 의미할까?《통전》平州條를 보면 다음과 같은 설명이 있다.

 

平州는 殷(商)시대에 孤竹國이었고 春秋시대에는 山戎과 肥子 두 나라 땅이었다. 戰國시대에는 燕나라에 속하였고 秦帝國에서는 右北平과 遼西 두 군의 境城을 삼았는데 兩漢에서도 이를 따랐다. 晉나라에서는 요서군에 속하게 하였는데 後魏 또한 요서군이라 하였다. 隋나라 초에 평주를 설치하였는데(수나라) 煬帝 초에 州를 폐지하고 다시 北平郡을 설치하였다. 大唐에서도 이를 따랐다.

 

  이로 보아 평주·요서군·북평군은 그 영역이 일정하지는 않았지만 같은 지역에서 그 이름이 바뀌었음을 알 수 있다. 이에 따라 백제가 진출했던 진평군은 요서군과 접해 있었던 지역으로서 진나라의 평주를 뜻할 것으로 보는 견해가 있다.

 그런데《송서》〈지리지〉光州郡條를 보면 鬱林郡에 晉平縣이 있었음이 확인된다. 이곳은 지금의 廣西壯族自治區 邕寧縣으로서 옹녕현에는 현재 百濟郡이라는 지명이 있다. 이곳에 백제라는 지명이 남아 있는 것으로 보아《송서》와 《양서》의 백제전에 보이는 진평군은《송서》〈지리지〉에 보이는 올림군의 진평현을 잘못 기록했을 것으로 보는 견해가 있다. 이 견해를 따른다면 당시 백제는 북쪽의 난하 서부 유역과 남쪽의 광서장족자치구 옹녕현 지역에 근거지를 가지고 있었다는 것이 된다.

 여기서 한 가지 알아야 할 것은 중국 고대의 행정구역이었던 요서군과 요동군은 지금의 요서나 요동과는 전혀 다른 곳에 있었다는 점이다. 요동군은 지금의 난하 하류유역에 있었고 요서군은 그 서북쪽에 있었는데, 난하 유역의 서부지역을 차지하고 있었던 것이다.

 晉시대를 지나 북위시대에도 백제는 중국에서 활동을 계속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한 사실은 앞에서 인용한《남제서》백제전의 기록에서 확인된다.《남제서》백제전에는 백제가 북위와 싸워 승리한 사실과, 그 전쟁에 참가했던 장수들에게 공로로 중국의 관직을 제수했는데 이를 제나라에서 승인한 사실이 기록되어 있다.

 그 내용을 보면 高達에게 行建威將軍 廣陽太守, 楊茂에게 行建威將軍 朝鮮太守를 주었다가 高達을 假行龍 將軍 帶方太守로, 陽茂를 假行建威將軍 廣陽太守로 옮겨 제수하였고, 會邁를 假行廣武將軍 淸河太守로, 慕遺를 行龍 將軍 樂浪太守로, 王茂를 行建武將軍 城陽太守로, 張塞를 行振武將軍 朝鮮太守로 제수하였다. 여기에 나오는 광양·조선·대방·광릉·청하·낙랑·성양 등은 모두 중국 지명이었다.

《위서》〈지형지〉를 보면,

 

廣陽郡 : 廷和 元年에 益州를 설치하였는데 眞君 2년에 고쳐서 郡을 삼았다.

朝鮮 : 兩漢으로부터 晉나라에 이르기까지는 낙랑에 속하였으나 나중에 없어졌다. 廷和 元年에 朝鮮民을 肥如로 옮겨 다시 설치하여 (北平郡)에 속하였다.

帶方 : 兩漢시대에는 (낙랑군에) 속하였으며 晉시대에는 대방군에 속하였다가 나중에 없어졌다. 正光 말에 다시 (樂浪郡)에 속하였다.

廣陵郡 : 興和 때에 東豫州를 나누어 설치하였다.

淸河郡 : 漢나라의 武帝가 설치하였다.

樂浪郡 : 前漢 武帝가 설치하였는데 兩漢시대로부터 晉시대까지는 樂浪이라 하였는데 나중에 바뀌었다가 없어졌다. 正光 말에 다시 설치하였다.

城陽郡 : 太和 3년에 설치했는데 나중에 없어졌다가 武定 초에 다시 설치하였다.    

 

등으로 기록되어 있다. 조선·대방·낙랑은 원래 서한이 위만조선을 멸망시키고 설치했던 군현(한사군)의 이름인데, 이 시게에는 고구려에게 이들 군현이 이미 축줄된 뒤였다. 따라서 이들은 원래의 위치에 있지 않았고 그 유민들을 정착시키기 위하여 지금의 난하 서부유역에 僑置되었던 것이다.

 위의 인용문 가운데 조선에 대한 설명은 그러한 사실을 분명하게 보여준다. 여기서 주의해야 할 것은 요즘 통용되고 있는 중국 역사지도에 이 시기의 樂良郡(樂浪郡의 이름이 변경되었음) 위치가 지금의 요하 서부의 大凌河 유역으로 잘못 표시되어 있다는 점이다. 그러한 잘못은 고대의 요서와 지금의 요서를 같은 곳으로 잘못 알고 있기 때문에 일어난 오류인 것이다. 고대에 나타나는 요서는 지금의 북경 북부지역이었다.

 광양군은 지금의 하북성 隆化 지역으로서 난하 상류유역이었고, 광릉군은 지금의 강소성 揚州 지역이었으며, 청하군은 지금의 산동성 益都 지역이었다. 그런데 성양군의 위치에는 다소 문제가 있다, 남북조시대의 성양군은 지금의 하남성 信陽 지역이었는데, 이곳은 중국의 내륙 깊은 곳이어서 백제가 영향력을 행사했다고 보기에는 어렵다. 따라서 다른 곳을 가리켰을 가능성이 있는데, 앞의 광릉군과 청하군의 중간 지점에 晉시대의 성양군이 있다. 그곳은 지금의 산동성  縣 지역으로 바다에 가까운 곳이다. 이러한 지리 조건으로 보아《남제서》백제전에 보이는 성양군은 진시대의 성양군을 말하는 것으로 생각된다.

 백제가 중국에서 지배권을 행사한 것은 북위가 멸망한 뒤 북제시대까지도 계속되었던 것으로 보인다.《북제서》〈후주기〉와《삼국사기》〈백제본기〉위덕왕 17년조에는 북제에서 백제의 위덕왕을 使持節·都督·東靑州刺史로 삼았다는 기록이 있다. 백제의 위덕왕이 동청주의 문무대권을 장악한 것을 북제가 인정했다는 것이다.

 동청주는 지금의 어느 곳인가?《북제서》에는 지리지가 없다. 북위가 분열하여 서기 534년에 동위는 北齊, 서기 535년에 서위는 北周라고 나라 이름을 고쳤다, 따라서 북제는 북위의 행정구역 이름을 대개 그대로 따르고 있었다.

 그러므로《위서》〈지형지〉를 보면 靑州가 있는데 이에 대해서,

 

後漢시대에는 治所가 臨淄였는데 司馬德宗은 치소를 東陽으로 하였고 魏는 그것을 따랐다.

 

고 하였는데《讀史方輿紀要》에는 靑州에 대해서,

 

처음에 北靑州의 치소는 東陽이었고 南靑州의 치소는 廣陵이었다. 나중에 남청주를 없애고 북청주를 바로 靑州라고 불렀다. 孝建 2년에 歷城으로 옮겨 치소로 삼았다가 大明 8년에 동양으로 돌아와 치소로 삼았다. 泰始중에

淮河의 북쪽을 잃게 되어 청주를 임시로 옮겨 鬱州를 치소로 하였다. 전에

9개의 군을 통괄하였는데 濟郡·濟南·樂安·高密·平昌·北海·東萊·長廣 등은 모두 옛 군이다. …… 泰始 4년에 다시 청주를 나누었는데 동청주의 치소는 不其城으로서 지금의 萊州府 膠州에 있는데 卽墨顯 서남 50리이다.

 

라고 하였다. 이 내용에서 보면 청주는 한때 동양을 치소로 삼았다고 하였는데, 앞의《위서》〈지형지〉에서도 청주의 치소가 동양이었다고 하였다. 그러므로 이 두 청주는 같은 곳임을 알 수 있다.《독사방여기요》의 내용으로 보아 동청주는 청주를 나누어 설치했던 곳으로서 그 치소는 不其城이었는데 卽墨에서 50리 지점에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즉묵은 지금도 그 지명을 그대로 가지고 산동성에 있는데 그 서남쪽에 불기성이 있었다. 그러므로 동청주는 지금의 교주만 연안으로서 광역의 청도시 지역이었음을 알 수 있다. 이 지역은 이전의 북위시대에 백제가 지배했던 지역애 포함된다. 이 지역에 대한 백제의 지배는 계속되고 있었다고 보아야 하겠다.

 지금까지 살펴본 바와 같이 백제는 북쪽으로는 지금의 난하 유역부터 남쪽으로는 강소성의 남부에 이르는 지역에 지배권을 행사하였다. 이러한 사실은 崔致遠의 글에서도 확인된다.《삼국사기》최치원전에 실린 上太師侍中狀에,

 

고(구)려와 백제는 전성했을 때 강한 군사가 1백만 명이어서 남쪽으로는 吳와 越을 침공하고 북쪽으로는 (중국 북부의) 幽·燕·濟·魯 등의 지역을 흔들어서 중국의 큰 두통이 되었으며, 隋의 황제가 세력을 잃은 것은 저 요동(지금의 요서)을 정벌했기 때문이다.

 

라는 내용이 보인다. 이 글에서 백제가 침공했다고 말한 북쪽의 幽·燕·濟·魯는 지금의 난하 유역부터 산동성에 이르는 지역이며, 吳나라는 강소성 지역에 있었고 越나라는 절강성 지역에 있었으므로 월나라가 있었던 절강성 지역을 제외하면 앞에서 확인된 백제의 중국 지배영역과 일치한다.

 위의 최치원의 표현을 과장된 것으로 보는 견해가 있지만 앞에서 고찰된 여러 사료들은 그것이 사실이었음을 뒷받침해 준다. 최치원의 글은 唐나라의 太師侍中에게 쓴 편지인데, 백제의 중국 침공이 사실이 아니었다면 그러한 내용을 감히 적을 수 없었을 것이다.

 

4. 백제의 중국진출 시기와 배경

 지금까지 백제가 중국에 진출했던 지역을 확인해 보았다. 이제 언제부터 백제가 그 지역에 진출했으며 그 역사적 배경은 무엇이었는지를 살펴보도록 하겠다.

《송서》와《양서》의 백제전에는 백제는 晉시대에 이미 요서 지역에 진출해 있었는데 그 시기는 고구려가 요동에 진출했던 시기와 같은 때라고 하였다.  그러므로 백제가 요서 지역에 진출한 시기는 晉시대보다 앞선다는 뜻이 된다. 晉시대보다 앞선 시기로서 고구려가 요동에 진출했던 시기여야 하는 것이다.

 그런데 고구려는 지금의 요동 지역에서 건국되었으므로,《송서》와《양서》가 백제전에서 말한 고구려가 진출했던 요동은 고구려가 건국한 지역을 뜻하지 않을 것이다. 고대에는 지금과 달리 일반적 의미의 요동은 지금의 요서 지역이었고, 행정구역인 요동군은 지금의 난하 유역에 그대로 있었다. 그런데 지금의 요서 지역에 한사군이 설치된 뒤 일반적 의미의 요동은 지금의 요동 지역으로 이동하였으나 요동군은 난하 유역에 그대로 있었다. 행정구역은 개편이 있기까지는 이동하지 않기 때문이다.

《송서》와《양서》가 편찬된 시기는 한사군이 설치된 이후에 해당하므로 지금의 요동이 일반적 의미의 요동으로 불리고 있었다. 그곳은 고구려 건국지이므로 그곳에는 처음부터 고구려가 자리잡고 있었다. 그러므로《송서》와《양서》의 백제전에서 말한 고구려가 진출했던 요동은 일반적 의미의 요동이 아니라 요동군을 말한 것이다. 그러면 고구려는 어느 시기에 요동군 지역에 진출했을까?

 고구려가 요동에 진출한 기록 가운데 가장 이른 연대는 서기 49년이다.《삼국사기》〈고구려본기〉모본왕조에,

 

慕本王 2년(서기 49년) 봄에 왕이 장수를 보내 漢나라의 (右)北平·漁陽·上谷·太原을 습격하였으나 (漢)의 요동태수 蔡 이 恩誼와 신의로써 우리를 대접하므로 곧 다시 화친하였다.

 

고 하였는데 이와 같은 내용이《후한서》〈동이열전〉애도 보인다. 右北平·漁陽·上谷 등은 서한과 동한시대에 동북의 국경지역에 위치했던 군 이름인데, 太原郡의 위치는 이들보다 훨씬 서쪽의 황하 유역으로서 지금의 산서성 太原市 지역이었다.

 당시에 요동군은 태원군보다는 훨씬 동쪽에 있었으므로 모본왕 때에 고구려는 요동을 넘어 그보다 훨씬 서쪽까지 진출했던 것이다. 그러나 인용된 기록의 내용으로 보아 고구려는 그 지역을 계속 차지하고 있지는 않았던 듯하다.

 《삼국사기》〈고구려본기〉태조대왕조에는 고구려가 여러 차례 요동군을 쳐들어간 기록이 보인다. 서기 105년에는 고구려가 장수를 파견하여 요동군에 쳐들어가 여섯 현을 빼앗았으나 遼東太守 耿夔에게 패하였으며, 서기 121년에는 동한의 유주자사 馮煥, 현도태수 姚光, 요동태수 蔡諷 등이 군사를 거느리고 고구려를 쳐들어오므로 태조왕은 아우 遂成으로 허여금 군사 2천여 명을 이끌고 이들을 맞아 싸우도록 했는데, 수성은 현도와 요동 두 군을 공격하여 그 성곽을 불태우고 2천여 명을 죽이거나 붙잡아왔다. 또 그 해 여름 4월에는 태조왕이 鮮卑 8천 명과 더불어 요동군의 遼隊縣을 공격하였는데, 요동태수 채풍이 군사를 거느리고 신창에 출전하였다가 전사하였다. 이때 사망한 동한의 병사는100여 명이나 되었다. 동한의 質帝와 桓帝시대인 서기 146년부터 167년까지도 고구려는 요동군의 서안평현을 쳐들어가 帶方令을 죽이고 낙랑태수 처자를 붙잡았다.

 고구려는 서기 49년부터 이미 요동 지역에 진출하기 시작하여 사기 150년대에 이르기까지 여러 차례에 걸쳐 요동군을 습격하거니 요동군 지역에서 전쟁을 하였다. 이러한 고구려와 중국 사이의 전쟁은 계속되어 고구려 미천왕 때인 서기 313년부터 315년까지는 난하 동쪽에 있었던 현도군과 낙랑군을 난하 서쪽으로 완전히 축출하였던 것이다. 그렇다면 이 시기에 백제도 요서 지역에 진출했을까? 그렇다고 말하기에는 너무 막연하고 근거가 빈약하다. 그러므로 백제가 요서에 진출했음을 알게 하는 좀 더 분명한 근거를 찾을 필요가 있다. 그러한 기록들이《삼국사기》〈백제본기〉에 보인다.《삼국사기》〈백제본기〉고이왕조에는 서기 246년(백제 고이왕 13년)에 중국 위나라의 유주자사  丘儉이 낙랑태수 劉茂, 삭방태수 王遵과 더불어 고구려를 침략하였는데, 백제는 이 틈을 이용하여 左將 眞忠으로 하여금 낙랑의 변경을 습격하고 그곳 주민을 빼앗았다는 기록이 있다.

 낙랑은 두 개가 있었다. 낙랑군과 최씨 낙랑국이 그것이다. 낙랑군에는 태수가 있었으므로 백제의 좌장 진충이 쳐들어간 낙랑은 낙랑군 이었음을 알 수 있다. 낙랑군은 지금의 요서 서부 변경인 난하 동부유역에 있었다. 진충 장군은 북경 근처 난하 유역에서 전쟁을 했던 것이다.

 백제가 이전부터 난하 유역에 근거지를 가지고 있었던 것인지, 이 시기에 처음으로 진충 장군이 바다를 건너가 근거지를 만든 것인지 위의 내용만으로는 알 수가 없으나 위나라의 고구려 침략으로 그 지역이 비게 되자  진충 장군이 바로 군사를 움직인 것으로 보아 진충 장군이 한반도 남부에서 바다를 건너갔다고 보기는 어렵다. 따라서 백제는 이전부터 난하 유역에 근거지를 가지고 있었다고 보는 것이 합리적일 것이다.

 《삼국사기》〈백제본기〉책계왕조에,

 

13년(서기 298년) 가을 9월에 漢이 貊人들과 함께 쳐들어오므로 왕이 나아가 막다가 적병에게 해를 입어 돌아가셨다.

 

는 기록이 있다. 서기 298년은 중국 晉나라 惠帝 때이다. 그러므로 위 기록애서 漢은 漢族, 즉 중국인들이라는 뜻이다. 그리고 貊人은 중국이 지금의 요서 지역에 한사군을 설치하고 그 지역을 그들의 영토로 편입시킬 때 동쪽으로 이주하지 못하고 그 지역에 남아 있었던 貊族을 말할 것이다. 고조선시대에 맥족은 난하 유역에 거주하고 있었으나, 요서지역에 위만조선이 서고 다시 한사군이 설치되자 그 일부가 동쪽으로 이주를 했다. 따라서 맥족의 일부는 이 시기에 난하 유역이나 그곳에서 가까운 지역에 거주하고 있었던 것이다. 漢族이 지금의 난하 유역에 살고 있었던 맥인들을 동원한 것으로 보아 이 전쟁은 난하 유역에서 있었던 것으로 보는 것이 합리적일 것이다.

 《삼국사기》〈백제본기〉분서왕조애도,

 

7년(서가 304년) 봄 2월에 몰래 군사를 보내 낙랑의 서부 현을 공격하여 빼앗았다. 겨울 10월에는 왕이 낙랑태수가 보낸 자객에게 해를 입어 돌아가셨다.

 

는 기록이 보인다. 백제의 분서왕은 군사를 보내 낙랑의 서부 현을 빼앗았으며, 그로 말미암아 낙랑태수가 보낸 자객에게 살해당했다. 현은 군에 속해 있었던 행정구역이고 태수는 군을 다스리는 지방관리였으므로 이 낙랑은 낙랑군 이었음이 분명하다. 그런데 낙랑군은 지금의 난하 동부유역에 있었다, 그러므로 이 전쟁은 난하 유역에서 일어났던 것이다.

 이상의 기록들은 백제가 서기 246년 이전에 이미 지금의 난하 유역에 진출했음을 알게 해준다. 백제가 진출했던 난하 유역은 앞에서 이미 확인한 것처럼 요서군 지역이었던 것이다. 그러면 백제는 언제까지 요서군 지역을 포함한 중국 동부 해안지역의 지배권을 행사하고 있었을까? 이미 확인한 것처럼 이에 관한 가장 늦은 기록은《북제서》〈후주기〉와《삼국사기》〈백제본기〉위덕왕 17년조이다. 북제 후주가 백제의 위덕왕을 使持節·都督·東靑州刺史로 삼았다는 것이다. 백제의 위덕왕이 동청주의 문무대권을 장악한 것을 북제가 인정했다는 것이다.  

 북제의 후주 緯가 재위했던 연대는 서기 565년부터 577년까지이다. 북위가 분열하여 서기 534년에 동위, 서기 535년에 서위가 섰다가 이들이 각각 북제와 북주라 하였는데, 서기 577년에 북제는 북주에게 멸망당하고 서기 581년에 북주의 정권은 외척인 楊堅에게 넘어가 수나라가 건국되었다. 수나라는 서기 589년애 남쪽의 陳나라를 멸망시키고 중국을 통일하였다.

 그러므로 백제의 위덕왕이 중국 북제의 후주로부터 사지절·도독·동청주자사를 제수 받은 것은 수나라가 중국을 통일하기 불과 10여 년 전이었다. 이러한 사실을 종합해 볼 때 백제가 중국 동부 해안지역에 대한 지배권을 포기한 시기는 수나라가 중국을 통일한 시기이거나 그보다 불과 몇 년 앞선 시기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상과 같이 백제는 서기 246년 이전부터 서기 588년경까지 매우 오랜 기간을 중국 동부 해안지역을 지배했다. 그 영역은 초기에는 난하 유역부터 하북성 중부까지였으나 그 영역을 점차 남쪽으로 확대하여 산동성을 포괄하고 강소성 남부에까지 이르렀다. 최치원의 글에 따르면 절강성도 백제의 지배권에 들어 있었을 가능성이 있으나 구체적인 사료가 확인되지 않는다. 그리고 광서장족자치구 옹녕현 지역에도 근거지를 기지고 있었을 가능성이 있다.

 그렇다면 한반도 남부에 있었던 백제가 거대한 중국의 동북 해안지역을 지배했다는 것이 과연 가능했을까? 그리고 백제가 그곳에 진출한 것은 과연 어떤 의미를 지니고 있을까?

 백제가 중국에 진출하여 활동했던 시기는 한족들의 세력은 지극히 약화되어 중국대륙을 지배할 능력이 없었고 그때까지 중국 정치와 문화의 중심지였던 북방 지역은 여러 이민족들에게 유린되어 있었다. 이 시기에 중국 북방을 유린했던 흉노·갈·선비·저·강 등은 고구려나 백제보다 강한 세력은 결코 아니었다. 이 시기에 고구려와 백제가 중국에 진출한 것을 불가능한 것으로 보아야 할 이유가 전혀 없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부정설을 주장하는 이들은 한결같이 선비족이 세운 북위가 강대했다고 이야기한다. 그렇다면 북위가 북제와  북주로 나누어지고 백제와의 전쟁에서 패한 것, 특히 북위의 군대는 기병이 중심이 되었는데 백제의 기병을 당해내지 못하고 패한 것은 백제가 군사력에서 우위에 있었음을 증명해 준다.

 백제와 고구려의 사이가 나빠진 것은 고구려 고국원왕 때에 전쟁을 하면서부터였다. 그 전에는 백제와 고구려의 사이가 나쁘지 않았다. 그러한 사실은 백제의 개로왕이 북위에 보낸 국서의 내용에서 확인된다. 고구려가 백제를 친 것은 고국원왕 39년으로서 서기 369년이었다. 백제는 이보다 훨씬 전부터 난하 유역에 진출해 있었다. 다시 말하면 백제가 난하 유역에 진출했던 시기는 고구려와 우의가 돈독했던 때였다. 앞에 인용된《삼국사기》〈백제본기〉고이왕 13년 조에 따르면, 위나라의 유주자사 관구검이 고구려를 쳤을 때 백제의 좌장 진충은 북위의 낙랑군을 공격하였다. 백제가 낙랑군을 친 것은 자신의 영역을 확장하면서 동시에 고구려를 돕기 위한 목적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서기 369년 백제와 고구려가 전쟁을 치른 뒤 두 나라 사이의 상황은 바뀌었을 것이다.

《남제서》백제전에는 백제의 진출지역에서 공로를 세운 백제의 장수와 관리들에게 백제가 관직을 제수 했음은 물론, 南濟에서도 관직을 제수 받은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당시에 南朝는 漢族의 정권이었다. 그런데 자신들의 힘으로 북방을 회복할 능력이 없었던 남조로서는 북방회복에 백제의 힘을 빌릴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을 것이고 백제로서도 漢族 정권인 남조의 관직을 제수 받는 것이 그 지역 토착민을 지배하는데 도움이 되었을 것이다. 이러한 상호 이해관계는 백제와 남조를 매우 친밀한 관계로 만들었고 백제와 북조와는 소원한 관계를 만들었을 것이다. 북조의 역사서에 백제의 중국 진출에 관한 기록이 빠진 것도 이러한 상황과 관련이 있을 것이다. 그러나 북조도 백제의 중국 진출을 현실적으로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북제가 백제 위덕왕을 사지절·도독·동청주자사로 제수한 것은 그러한 사실을 말해 주는 것이다.

 

5. 맺음말

지금까지 살펴 본 바에 의하면 백제의 요서경략은 움직일 수 없는 사실이다. 백제가 중국에 처음 진출했던 요서군과 진평군 지역은 지금의 난하 유역에서 서남으로 하북성 중부의 안평 지역까지와 광서장족자치구의 옹녕현 지역이었다. 난하 유역에서 하북성 중부까지를 차지하고 기반을 닦은 백제는 그 세력을 점차 남쪽으로 확장하여 지금의 산동성 지역을 거쳐 강소성 남부 양주 지역까지를 장악하였다. 백제는 지금의 절강성까지 진출했을 가능성도 있지만 분명한 기록을 찾을 수 없다. 또한 어느 시기까지 광서장족자치구 옹녕현 지역에 근거지를 가지고 있었는지도 확실하게 알 수가 없다.

 백제가 중국에 진출한 시기는 서기 264년 이전으로 추정되며 이보다 앞서 고구려는 이미 당시의 요동(지금의 난하 유역) 지역에 진출해 있었다. 백제는 서기 589년 수나라가 중국을 통일하기 바로 전까지 중국의 동부 해안지역을  지배하였다.

 백제가 중국에 진출했던 시기는 중국이 위·촉한·오의 세 나라로 분열되었던 시기인데, 뒤에 한때 진나라에 의한 통일기가 있었지만 그것은 잠시였고 계속해서 중국 북방은 이민족들의 정권이 흥망을 거듭하면서 혼란이 계속되었다. 이러한 혼란은 이른바 '요서경략'으로 일컬어지는 백제가 중국에 진출하여 그 지역을 계속해서 지배하는데 유리한 조건을 제공해 주었고 당시 남조를 형성하고 있던 漢族 정권은 세력이 매우 약했다. 그러므로 이들은 백제의 힘을 빌어 북방을 수복해 보자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따라서 이들은 백제와 화친관계를 유지하면서 중국 동부 해안지역에서 활동하는 백제 관리와 장수들에게 사지절·도독·장군·태수 등의 중국 관직을 제수하였다. 또한 백제로서도 그러한 관직이 필요하였는데 중국의 관직은 현지의 한족들과 토착민들을 지배하는데 명분을 제공해 주기 때문이다.

 '요서경략'으로 일컬어지는      백제의 중국 동부 해안지역 지배는 백제가 고구려와 더불어 동북아시아에서 강대국이었음을 다시금 일깨워준다. 그러한 좋은 예는 일본에 남아있는 백제와 관련된 지명들과 백제 식의 산성이 존재하며 심지어 그들의 신사에 백제인들이 신으로 모셔진 것에서 알 수 있다.  

 더불어 학계에서 흔히 삼국시대라고 일컫는 시기의 역사가 삼족정과 같은 균형을 이루려면 고구려사·신라사 외에 백제사 연구도 그에 걸맞는 활동과 지원이 있어야 할 것이다.

 

參考 文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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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용파더 | 2009/07/28 16:51 | 다국시대(펌) | 트랙백 | 덧글(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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