中학계 "한자는 동이족 문자...한국만 몰라"

http://www.newdaily.co.kr/news/article.html?no=75706

by 용파더 | 2012/02/13 20:05 | 기타 | 트랙백 | 덧글(0)

[펌] 554년 관산성 전투 재고찰

554년 관산성 전투 재고찰
 

이 사건은 기전체인 삼국사기의 기록이 너무 소략하여 삼국사기의 내용만으로는 
매우 납득하기 힘든 기록이 된다.

삼국사기 기록으로는 554년(백제 성왕 32년, 신라 진흥왕 15년, 고구려 양원왕 10년) 
7월에 관산성 전투가 발생되어 성왕이 전사하고 장병 2만9천6백명이 참살 당했다는 기록이다.
클릭 ===> 삼국사기 신라본기 진흥왕 15년 (554년) 기사 참조
 

그리고9월에는 관산성 전투에서 성왕의 죽음으로 대패한 초상집에서 기적같이 
다시 군사를 일으켜 신라의 진성을 침범하여 남녀 3만9천명과 말 3천필을 약탈해 갔다는 
삼국유사의 기록이다.
클릭 ===> 삼국유사 기이 진흥왕편 기사 참조
 

이 내용으로는 국왕이 전사한 패전의 심각한 휴유증이 가시기도 전에 
초상집에서 대규모의 군사동원하여 복수전을 펼친 것으로 된다.
그러나 결코 쉽지 않은 일이며 납득조차 하기 힘든 내용이다.

더욱 납득하기 힘든 것은 고구려의 행동이다.

고구려는 10월달에 대규모의 군사를 내어 백제 수도 근방인 웅천성을 공격한다. 
클릭 ===> 삼국사기 백제본기 성왕 32년, 위덕왕 원년 (554년) 기사 참조
클릭 ===> 삼국사기 고구려 본기 양원왕 10년 (554년) 기사 참조 
 

아무리 웬수같은 적국이지만 비록 문상을 보내지는 못할 망정 
대규모의 군사를 동원하여 초상집을 침략하는 경우는 명분을 중요시 했던 
고대의 전쟁 생리상 어울리지 않는 내용이며 
신라의 영토를 뛰어 넘어 백제 수도까지 쳐들어 갔다는 것은 더욱더 납득하기 힘들다.
 
백제가 잘 방어하여 고구려의 공격이 실패로 돌아갔지만....
이런 일이 가능하기나 할까?
 
사실이라면 국왕및 좌평4인의 국가 수뇌부의 초상에도 불구하고 
이를 극복한 백제의 괴력에 혀를 내 두를 수 밖에 없다.
  
그렇다면 이 내용은 다시 살펴 볼 필요가 있다

그런데 일본서기에 따르면 비로소 납득이 된다.
  
554년 5월에 군사를 내어 6월에 백제에 도착했다는 기사와 더불어
12월 9일에 신라를 공격, 函山城(관산성으로 추정)을 공격, 함락 시켰다는 내용과 
이를 알리기 위해 왜국의 흠명천황에게 사신을 보낸 기록이 있으므로 
클릭 ===> 일본서기 흠명천황 15년(554년) 기사 참조
 

적어도 백제 성왕은 554년 겨울 12월 9일까지는 살아 있었다는 내용이다.

그렇다면 위의 불가사이한 전투 기록사가 최소한 납득할 만해진다.

이를 다시 재구성해 보면 그 전말은 이러한 내용이 된다.

일본의 왜군이 5월에 군사를 징집하여 6월에 백제에 도착하였으며 
왜군과 가야병이 집결되자 백제는 연합군을 결성하여 7월 부터 본격적인 침공을 시작한다.

9월에 신라와의 전투에서 백제왕자 여창의 활약이 눈부시다.
신라의 진성을 침범하여 남녀 3만9천명과 말 3천필을 약탈할 정도로 
백제는 서전을 장식하면서 기세를 올린다.

이에 신라에서는 각간 우덕과 탐지등으로 하여금 이를 방어하도록 하였으나 
백제의 강한 공격력으로 신라는 苦戰을 계속한다.

이에 신라는 평양성 함락시 고구려를 아예 멸망시킬때까지 끝장을 내자는 
백제 성왕의 요구를 묵살하고 오히려 고구려와 밀약을 맺어 이를 무산시켜 준 보답으로 
고구려에 원군을 요청한다.
 
고구려 역시 백제의 성왕에게 당한 치욕을 갚기위해 신라가 길을 열어 준 영토(한수 지역)를 
가로 질러 아예 백제수도인 웅천지역으로 진격 웅천성을 공격한다.
 

이 싸움에서 백제는 이미 신라와 전투에서 매번 승리한 기세로 사기가 충천해 
자신의 영토에 깊숙히 들어 온 고구려군과 잘 싸워 이를 물리 치기게 된다. 
 
고구려군과 전투를 하는 동안 백제의 공세가 주춤하는 사이 
신라는 한숨을 돌리며 전투력을 재정비한다.

고구려군은 백제영토 깊숙한 곳에서 승리하지 못한채 퇴각해 버린다.
 

이를 관망하던 신주의김무력부대는 고구려군이 퇴각을 함에 따라 
배후의 고구려를 견재할 필요가 없게 되자 급기야는 관산성 전투에 나서게 된다.
 

고구려군을 물리친 백제는 사기충천(士氣衝天)하여 다시 신라의 관산성을 공격하여
마침내 12월 9일 관산성을 함락시키게 된다.
 

거의 7월부터 겨울 12월까지 장기간 치뤄지는 전투에서 승리를 한 
왕자 부여 창의 노고를 위로하기 위해 좌평4인과 50명의 근위병만 대동한채 관산성으로 향하는데 
가야출신 김무력 부대의 첩보망에 의해 노출된 백제 성왕의 행군로를 파악한 후에
그의 비장인 삼년산군 고간 도도를 성왕의 행군로 길목에 매복시켜 성왕을 사로 잡아 살해해 버린다.
(대략 연합군중 가야인의 첩자를 이용한 것으로 추측)
 

이것을 빌미로 승승장구하던 백제군은 국왕의 전사에 패닉(Panic)상태가 되고 
반면에 신라군은 사기가 올라 단숨에 전세는 역전되고 
왕을 비롯한 좌평 네 사람과 장병 2만 9천6백 명을 참살 당하는등 대패를 하게 된다.
 

이것이 바로 관산성 전투의 전말이 아닌가? 한다
     

그래야만 9월에 삼국유사에서 
소개된 진성을 침범하여 남녀 3만9천명과 말 3천 필을 빼앗아 갔다는 기사가 성립되고

10월에 고구려가 신라영토를 가로질러
 백제 수도지역 웅천성까지 진격해 전투를 벌였던 내용이 성립 된다.
 
적어도 12월 9일 까지는 일본 서기에 의해 
백제 성왕은 전사하지 않고 일본에 사신을 파견한 것으로 되어 있다.

by 용파더 | 2012/02/08 13:47 | 다국시대(펌) | 트랙백 | 덧글(0)

오사카 ‘고대 백제인’ 말사육 유적 확인

http://www.hani.co.kr/arti/culture/culture_general/450494.html

by 용파더 | 2010/11/25 15:28 | 다국시대(펌) | 트랙백 | 덧글(0)

집중분석, 고조선인은 어떻게 살았나?

[역사스페셜]


집중분석, 고조선인은 어떻게 살았나?



아주 먼 옛날 ,한반도와 요녕지역에 걸쳐 세력권을 형성했던 고대국가가 있었습니다. 우리 역사상 최초의 국가, 그 이름은 고조선입니다. 고조선에 관한 기록과 유물유적이 워낙 적기 때문에 고조선이 어떤 사회였는지 파악하기는 쉽지 않습니다. 지금까지 고조선에 대한 주요 관심이 주로 영역은 어디까지였고, 국가체제는 어떠했나 하는 것에 머물렀던 것도 그런 이유이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최근 청동기 시대의 유적들이 하나 둘 발굴되면서 그 동안 베일에 싸여있던 고조선 사람들의 생활상이 서서히 드러나기 시작했습니다. 고조선시대에 철기가 도입되긴 하지만 그것은 말기였고 대부분의 기간은 청동기 시대에 해당합니다. 청동기 시대는 지금으로부터 2300여 년에서 무려 4천 년 전까지 거슬러 올라갑니다. 그야말로 까마득한 옛날이라 아마도 청동기 시대하면 무척이나 원시적인 생활을 했을 것이라고 생각하시는 분이 많을 텐데요.


고조선 사람들의 생활이 과연 그랬을까요?

어쩌면 우리의 상상과를 전혀 다른 삶을 살고 있지는 않았을까요?


고조선 사람들은 어떻게 살고 있었는지, 그 시대의 마을로 들어가 보겠습니다.

 


울산 검단리 마을엔 농촌 어디서나 볼 수 있는 나즈막한 언덕이 있다. 이 언덕을 중심으로 넓게 펼쳐져 있는 논밭에서 지난 1990년, 아주 오래된 유적이 드러났다. 4000평 크기의 전망 좋은 언덕, 이곳은 지금으로부터 2600년 전, 청동기 시대 마을 터였다. 검단리에서 출토된 유물은 현재 부산대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석검을 비롯해 그 대부분이 돌로 만든 석기들이다. 2600년 전 검단리 사람들이 사용했을 이 유물 은 오랜 세월 속에 묻혀있던 청동기인들의 삶을 보여주고 있다. 모두 3개월에 걸친 발굴조사 결과 검단리 마을에서는 93개의 집터가 드러났다.

 

  

 

그 중 가장 많은 수를 차지하고 있는 것이 이 정정사각형 모양의 집터다. 그런데 특이하게도 이 집터에는 똑같이 네 개의 구멍이 보인다. 구멍 위치도 정사각형 각 모서리의 안쪽으로 일정하다. 이 구멍은 무엇일까 ?


전옥련 부산대 박물관 학예연구실장

인터뷰) 주거지 내부에서 일단 기둥이 설치되어야 되는 지점에 일단 정형화되어 나타나고 있습니다. 그리고 어짜피 이게 집으로 가옥으로 만들어 진 것이기 때문에 지붕을 꼭 필요하고 그리고 나오는 위치라든지 이런 것으로 봤을 때 기둥으로 볼 수밖에 없는 이런 흔적들이거든요.

 

 

집터에서는 기둥의 재료를 파악할 수 있는 단서가 발견됐다. 기둥의 탄화재였다. 이 탄화재를 분석한 결과 기둥은 참나무와 상수리나무로 밝혀졌다. 주거지 터는 모양에 따라 그 크기도 다양한데 정사각형의 집은 대체로 5-6평 크기라고 한다. 발굴된 흔적을 토대로 정사각형의 집을 복원해 보았다. 먼저 땅을 파고 네 개의 참나무 기둥을 세운 후 다시 여러 개의 보조기둥을 세운다. 그리고 이렇게 짚단 혹은 갈대를 엮어 지붕과 벽을 삼았을 것이다.


검단리 마을에서는 기둥구멍이 6개 이상인 집터 도 많이 발견됐다. 대체로 직사각형의 모양을 하고 있는데 이렇게 6개의 주 기둥을 세웠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 직사각형의 집은 정사각형에 비해 규모가 큰 것이 특징이다.


전옥련 

인터뷰) 방형에 있어서 정방형하고 긴 장방형 직사각형 하고 정사각형 두 가지가 있는데 각각의 시기에 상호간의 공존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일단 거기에 용도상이나 시기적인 차이 이런 것보다는 그 안에 있어서 좀 더 중심적인 역할을 하는 주거지인가 아니면 거기에 부속되는 주거지인가 하는 그런 차이고 내지는 고 안에서 좀더 위치적으로 중심되는 위치와 신분이라면 이상하지만은 그것보다 좀더 떨어지는 위치로 볼 수 있겠죠.

 


크고 작은 사각형 집들이 밀집해 있는 주거지 터에서 특이한 형태의 집터가 눈에 띄었다. 바로 원형 집 자리다. 두 개의 기둥으로 간단하게 지은 이 원형의 집은 직사각형이나 정사각형의 집보다는 앞선 형태로 추정되고 있다. 지금으로부터 2600년 전, 울주 검단리에는 청동기 시대 마을이 있었다. 신분의 차이에 따라 집의 규모를 달리했던 이 검단리 마을엔 모두 93가구, 약 400여명의 주민이 살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제가 지금 서있는 곳은 울주 검단리 마을입니다. 기원전 5-6세기, 그러니까 지금으로부터 2천 5.6백 년 전의 청동기시대 있었던 집입니다. 청동기시대 사람들이 살았던 집의 내부는 어떻게 생겼을까요. 참 궁금한데요. 한번 들어가 보겠습니다. 안에 들어와 보니까 집안이 이렇게 한눈에 들어옵니다. 원룸형식의 구조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그리고 또 이쪽 한켠에 보면 아주 평평한 돌이 놓여 있는데 그 옆에서 갈다만 칼이 발견된 것으로 봐서 이곳은 아마 석기를 만들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리고 이 바로 옆에는 화덕이 있군요. 이 화덕을 이용해서 음식도 하고 아마 추위도 피했을 것으로 여겨집니다. 또 이쪽을 보시죠. 당시 사용했을 그러한 토기들이 흩어져 있군요. 그리고 이 음식물을 저장해 놓은 항아리들도 눈에 보입니다. 또 이 집 주변을 둘러가면서 홈을 파 놓았는데 아마 이것은 배수로를 만들어 놓은 것 같습니다. 비가 많이 오거나 또는 물을 사용한 후에 빼기 그 물을 간편하게 밖으로 빼낼 수 있도록 그런 배수구 역할을 할 수 있도록 만들어 놓은 것 같습니다. 자, 어떠십니까 .이렇게 집 내부를 살펴보니까 청동기 시대 사람들의 생활을 어느 정도 짐작할 수 있지 않으십니까?


그런데 지금 우리가 본 것은 당시 생활의 아주 작은 단면에 불과합니다. 이 마을엔 어떤 시설이 있고 또 당시 사람들이 어떤 일을 했는지 청동기시대 마을을 좀 더 둘러보도록 하겠습니다.


고조선 사람들은 어떻게 살았을까?

 

 

진주 남강에 댐 공사가 시작되면서 수몰지구에 대한 대대적인 발굴조사가 실시됐다. 놀랍게도 그곳엔 구석기시대에서 철기시대에 이르는 거대한 유적이 있었다. 그 중의 하나인 이곳은 기원전 5세기 청동기시대 마을 터로 밝혀졌다. 그런데 이 마을엔 눈에 띄는 독특한 시설이 있다. 마을로 들어서는 입구에서 가장 먼저 만나는 것이 바로 이 도랑이다. 사람이 직접 판 것으로 보이는 이 도랑은 길이가 300미터. 마을에 들어서려면 반드시 이 도랑을 지나야 한다. 그런데 폭이 2미터에 깊이는 1.5미터로 도랑을 건너는 일이 결코 간단하지 않다. 도랑의 모양도 특이하다. 윗부분의 폭은 넓지만 밑으로 내려갈수록 좁아지는 V자 형이다.


박광렬 조사과장(경남고고학연구소)

인터뷰) 방어를 위해서 인공적으로 판 환호유적이 되겠습니다. 그렇다면 환호유적이라고 뭐냐? 외부의 적들이 쳐들어오는 것을 방어하기 위해서 깊이 판 흔적이 되겠습니다. 방어시설물이 되겠습니다.


이 도랑은 환호, 즉 적의 침략을 막기 위해 설치한 방어 시설물인 것이다. 그런데 환호 바로 옆에서 또 다른 흔적이 발견됐다. 이번엔 커다란 구멍자리였다. 원형 또는 사각형의 이 구멍들은 나무기둥을 세운 흔적으로 보인다. 마을을 빙 둘러 세워놓은 나무기둥, 그것은 목책이었다.


박광렬 조사과장

인터뷰) 환호가 1차 방어시설이라고 한다면 이 목책은 환호를 뛰어넘은 적들을 방어하는 2차 방어시설로서 이 두 개가 한꺼번에 세워짐에 따라서 강력한 방어체계가 되겠죠.

 


남강의 청동기 시대 마을은 환호와 목책, 2단계의 방어시설을 갖추고 있었다. 환호는 적이 마을로 들어오는 것을 막기 위한 1차 방어물이다. 그리고 이 환호 바로 안쪽에 높은 목책을 세웠는데 그것이 2차 방어물인 것이다. 목책은 환호를 뛰어넘은 적의 공격은 물론 돌과 화살을 막는 역할도 했을 것이다. 남강 마을의 방어시설은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마을 안쪽으로 발굴해 들어가자 중간 지점에서 깊은 구덩이들이 발견됐다. 크기와 구조가 마을 입구의 환호와 같았다. 이것 역시 또 하나의 환호인 것이다. 그런데 깊은 구덩이를 둥글게 이어놓은 이 환호는 뜻밖에도 두 줄을 이루고 있었다. 결국 이 마을은 입구에 큰 환호를 만들고 마을 중간지점에도 두 줄의 환호를 설치해 놓은 것이다. 외부의 적이 1차 방어선을 뚫는 다해도 마을 깊숙이 공격해 들어가기 위해서는 더욱 견고한 장애물을 넘어야 한다. 이렇듯 남강 마을은 2중 3중의 견고한 방어체계를 구축하고 있었다.

 


마을 안에서는 주거지 터와 함께 각종 물건을 만들었던 공장 터가 드러났다. 공장 터 중에서 큰 규모에 속하는 이 곳은 석기 제작소다. 2500년 전 청동기인들이 석기를 만들었던 이 공장 터에서 흥미로운 사실을 발견할 수 있었다.


정의도 학예실장(당시 경남 문화재 연구원) 설명

이것이 현재 남아있는 반제품입니다. 만들다 가 만거죠. 어떤 거를? 화살촉을 만들다가 만 겁니다. 여기 이 부분을 이렇게 갑니다. 갈아서 모양을 만들어 가다가 맨 마지막 단계에 오면 이것으로서 물을 좀 묻혀 가지고 최후의 공정을 합니다. 이런 형태의 돌을 갈아서 가공을 한 다음에 최종적으로는 이런 형태의 석촉을 만들게 됩니다.

 

 

이렇게 화살 하나를 만드는 과정에서도 각 단계마다 일의 분화가 이루어져 있었던 것이다.  또 공장 터에서 발굴된 유물들로 보아 각 공장마다 전문화가 이루어져 있음을 알 수 있었다. 돌칼 돌화살 등 석기를 전문으로 만들었던 석기 제작소와 함께 옥 제품만을 생산했던 옥 제작소도 있었다. 그리고 토기를 전문으로 생산하는 토기 제작소도 발견됐다.


정의도 학예실장 (경남문화재 연구원)

인터뷰) 사람들이 아마도 공간을 분할해 썼습니다. 여 기까지는 집자리, 여기서 여까지는 작업 공간, 이어서 묘역이 설치된 그런 공간을 가지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규모가 있는 마을이었나 보죠? 대단히 큰 마을입니다. 여기는 아무래도 묘지나 주거지를 통해서 보면 어떤 큰 집단 지도자가 있고 지도자 밑에 각기의 분화된 직업을 가지고 있는 그런 마을이었습니다.

 


이 청동기 마을의 전체 구조를 살펴보면 마을 입구에 옥 제작소가 있다. 마을 중간지점에 이르면 토기 제작소가 보인다. 이곳을 지나 다시 마을 안쪽으로 깊숙이 들어가면 석기 제작소를 만날 수 있다. 분화된 작업공간과 함께 철저한 방어시설을 갖춘 남강 마을, 이것이 2500년 전 청동기 마을의 모습이다.


이곳은 진주 남강 지역에 있었던 청동기 시대 마을입니다. 환호와 목책으로 튼튼하게 방어시설을 해 놓았는데요. 이렇게 방어시설을 갖춘 것은 외부로부터의 침입에 대비한 것입니다. 이정도 방어시설을 갖출 정도라면 이 마을이 외부로부터의 공격 즉 전쟁이 있었다는 사실을 엿볼 수 있게 해줍니다. 그리고 이 마을이 공격을 당했다는 것은 그만큼 지켜야 할 재산이 많았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자 이 마을을 부유하게 만든 그 원천이 무엇인지 한번 둘러보도록 하겠습니다. (주변 둘러보고, 반월형 석도 발견) 저기에 뭔가가 있습니다. 뭔지 한번 보겠습니다. 이 반달모양에 구멍이 두 개가 뚫려있는 아주 독특한 모양의 돌입니다. 이것은 반월형 석도라고 불리는 농기구입니다. 그저 한 조각의 돌처럼 보이는 이 반월형 석도는 고조선 시대의 생활을 알려주는 중요한 단서입니다. 이런 농기구가 나왔다는 것은 이곳에서 농사를 지었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농경문화가 발달했다

 

 

 

 

국립 중앙박물관에는 흥미로운 청동기 시대 유물이 있다. 바로 이 농경문 청동기다. 손바닥만한 크기의 이 청동기 겉면에는 특이하게도 농사와 관련된 그림들이 그려져 있는데 바로 이 그림 속에 청동기시대 농경수준을 알 수 있는 단서가 있다. 농경문 청동기의 그림을 자세히 살펴보면 먼저 곡식을 항아리에 저장하는 사람의 모습, 괭이 모양의 농기구를 높이 들고 있는 사람의 모습 그리고 따비로 보이는 농기구를 사용하는 모습도 보인다. 그런데 가늘게 줄이 쳐진 이 네모난 모양은 무엇인가?

 


청동기 시대의 밭 터를 확인해 보기로 했다. 청동기 시대 유적지인 진주남강 대평리 유적에서 수만 평에 이르는 밭 유적지가 발견됐다. 그런데 이 대평리 밭 터에는 놀라운 흔적이 남아 있었다. 폭 30센티미터의 고랑과 50센티미터의 두둑, 즉 밭이랑의 흔적이었다.


청동기 시대, 대평리 사람들이 어떻게 밭농사를 지었는지 알아보기 위해 발굴에 참여했던 경남대 박물관 팀을 찾았다. 대평리 밭 터에 있는 이랑의 흔적은 당시 밭농사의 수준이 꽤 높았음을 보여주고 있다.


이상길 교수 경남대 인문학부

인터뷰) 작물을 재배하게 되면 잡초가 엄청나게 자라나게 되는데 그걸 규칙적으로 잡초 제거를 하지 않으면 지력을 모두 잡초한테 뺏기기 때문에 작물이 계속성장 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아마 이 고랑을 따로 만들어서 효율적으로 잡초를 제거한다거나 잡초의 성장을 억제하는 그런 효과도 있을 것 같고 역시 작물을 열을 지어서 쭉 재배를 하기 때문에 기본적인 관리라든지 나중에는 수확이라든지 그런데도 훨씬 효율적이지 않을까 그렇게 생각합니다.

 

 

대평리에서는 수백 점의 경작용 석기가 출토됐는데 그 중에 반월형 석도가 있었다. 반월형 석도 3 청동기 시대에 등장하는 특징적인 농기구로 주로 이삭을 따는데 사용됐다고 한다.


이상길 교수

설명) 여기다 끈을 끼워가지고 여기 자세히 보시면 여기 마모가 이렇게 돼 있고 여기에는 이렇게 마모가 돼 있어요. 여기 닳아있죠. 그러니까 끈을 이렇게 끼고 요쪽으로 넣어서 끈을 손가락으로 껴서 잡고, 곡식의 이삭줄기만 따는 거죠.


반월형 석도는 이렇게 두 개의 구멍에 끈을 끼워 동그란 고리를 만든 후 ,그 고리에 엄지손가락을 넣고 사용했던 것이다. 청동기 시대 사람들은 어떤 작물을 재배했을까? 대평리에서는 많은 종류의 탄화된 곡식알갱이들이 출토됐는데 보리와 밀. 현재 확인된 곡식으로는 보리와 밀 기장과 조 등 10여 가지가 넘는다. 그 중에서 눈에 띄는 곡식이 있는데 바로 이 쌀

이다. 하지만 이것이 밭벼인지 아니면 논농사의 흔적인지는 아직 밝혀지지 않았다.

 

 

청동기 시대에 논농사가 이루어졌는지 그 유적을 찾아보기로 했다. 현재 아파트 단지가 건설되고 있는 울산 무거동, 지하 130미터 지점에서 2600년 전 청동기시대의 논 유적이 발굴됐다. 토양 분석결과 벼의 꽃가루와 함께 피의 꽃가루, 그리고 진딧물의 유충도 확인됐다. 논자리가 분명했다.


이상길 교수

인터뷰) 자연과학적인 분석방법으로 논흙에 남아있는 벼의 화분 꽃가루가 나와 있습니다. 그것을 플란토팔 분석이라고 하는 그런 방법을 쓰게 되면 그런 꽃가루를 추출할 수가 있는데 이 저희들이 조사했던 논흙에서 상당히 많은 양이 나왔습니다. 그 외에도 논바닥에서 경작도구의 흔적이라든지 사람 발자국 같은 거라든지 그런 여러 가지 것들이 있었기 때문에 그 부분을 논이라고 하는 데는 이의가 없을 것으로 생각이 됩니다.

 

 

논의 형태는 일정하지 않으나 대체로 직사각형을 이루고 논둑이 존재했다. 그리고 논에 물을 댄 흔적이 보이는데 논둑의 중간에는 물이 흐르도록 이렇게 수로를 터놓았다.


이상길 교수

인터뷰) 그 농사의 수준은 거의 상당한 정도에 이르렀다고 생각을 합니다. 그리고 기우에 대한 문제라든지 아니면 물의 조절이라든지 이런 걸 다 고려하게 되는 거죠. 그리고 역시 아마 농사에서 나온 역시 곡물들을 토기에서 저장을 한다든지 어떤 화덕시설을 만들어서 조리를 한다든지 이런 흔적들도 다 나타나고 있기 때문에 그런 환경의 문제도 포함해서 조리에 이르기까지 전체적인 것이 지금의 어떤 농촌과 비교해서도 전혀 손색이 없을 정도로 봐도 좋을 것 같습니다.


기원전 5-6세기, 고조선 시대의 농경은 이미 수준 높은 단계에 올라 있었다. 당시 사람들은 밭이랑을 만들어 잡초를 제거하고 농사에 필요한 도구를 개발하여 생산력을 높였다. 그리고 당시로서는 최첨단 산업인 논농사도 이루어졌던 것이다.


고조선 사람들은 수준 높은 농경문화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물론 일일이 손으로 농사를 지었지만 ,논에 물을 대고 밭에 이랑을 낸 것은 물론 지금 우리가 먹는 쌀이나 조 수수 같은 곡물을 그들도 재배해 먹었습니다. 그리고 고조선 사람들이 사용했던 농기구도 낫이나 괭이같이 지금까지 널리 쓰이고 있는 바로 그 농기구들의 원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자, 아주 먼 상상의 나라처럼 여겨지던 고조선 사람들이 삶이 점점 손에 잡히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한 가지 의문이 생깁니다. 농사를 짓는다는 것은 돌로 석기를 만드는 것처럼 그렇게 간단한 일이 아닙니다. 여러분도 잘 아시다시피 농사를 지으려면 무엇보다 절기를 알아야 합니다. 언제 기온이 올라가고 비가 오는지 알아야 씨를 뿌리고 곡식을 거둘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절기를 안다는 것은 바로 하늘을 안다는 것인데요. 그렇다면, 과연 고조선 사람들은 천문관측을 했을까요?



고조선은 천문관측을 했다


창원 덕천리. 지금은 군부대 병참기지가 들어선 이곳에는 청동기 시대의 유적이 있다. 바로 이 고인돌1)이다. 덮개 돌의 무개만 해도 35톤에 이르는 이 거대 한 고인돌은 독특한 구조를 가지고 있다고 한다. 땅 밑으로는 모두 네 개의 단을 파고 맨 아래에 무덤방을 놓았다. 시신이 있는 무덤방을 덮은 후 차례로 돌을 채우고 마지막으로 덮개돌을 얹는다. 지금까지 발견된 고인돌과는 전혀 다른 형식이었다. 구조뿐만이 아니라 이 고인돌 유적에는 또 다른 독특한 흔적이 있는데. 바로 석축의 흔적이다. 이 석축은 고인돌의 외곽을 둘러싸고 있는데 현재 발견된 길이는 남북 56미터, 동서 17미터에 이른다.

 


원래의 형태는 고인돌을 중심으로 석축을 쌓고 그 외곽엔 넓은도랑을 파 놓았다. 이것은 거대한 묘역이자 제단이었을 것이다. 그런데 이 유적에서 주목할 점이 있다. 고인돌을 둘러싸고 있는 석축의 한 변을 측정한 결과 정남향을 향하고 있다는 사실이 밝혀진 것이다.


이용복 교수 서울교대 천문학

인터뷰) 밤에는 물론 북극성을 잡아서 북쪽방향을 잡았겠지만 낮에는 정확하게 해의 태양의 운행을 가지고 잡았습니다. 뭐 간단한 예로 우리가 땅 바닥에 원을 그려 놓고 가운데에 나무를 세워 놓은 다음에 나무 끝이 향하는 그림자를 쭉 찍어나가다 보면은 원과 만나는 두 지점이 나옵니다. 그 두 지점을 수평이등분 했을 때 가리키는 방향이 정확한 북쪽입니다. 이건 동서를 막론하고 아주 고대부터 알려졌던 사실입니다

 

 

청동기 시대에 천체관측이 이루어졌다면 분명히 그 흔적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충북대 박물관팀은 지난 1978년 대청댐 수몰지역에서 청동기 시대의 고인돌 유적을 발굴했다. 그런데 이곳에서 특이한 판자돌이 출토됐다. 이것이 가호리 유적에서 출토된 바로 그 판자돌이다. 돌 표면에는 작은 구멍들이 나있는데 사람이 인공적으로 만든 흔적으로 보인다.


이 구멍들이 과연 무엇을 의미하는지 아직 정확하게 밝혀지지 않고 있지만, 이것이 별자리 일지도 모른다는 조심스런 추측이 제기되고 있다.


이융조 교수 충북대 고고미술사학과

인터뷰) 이 면과 둘레는 손질이 된 것이 분명합니다. 그런데 거기에서 나타나는 판판한 면에 굼 구멍보다는 굼인데 이 굼이 우리 쪽으로 관찰이 되고 배열이 돼 있으니까 이것은 여러 가지로 인위적인 배열이라고 한다면 그 가능성이 별자리일 가능성을 제시를 했었죠.


이것이 과연 별자리인지 천문학자의 자문을 구했다. 이용복 교수가 판자돌에 있는 구멍을 연결하자 별자리가 그려졌다. 그것은 바로 북두칠성이었다. 그런데 더욱 놀라운 사실은 이 고인돌 위에 그려진 북두칠성이 실제 별자리와 그 모양은 물론 별과 별 사이의 간격까지 정확히 일치하고 있는 것이다.


이용복 교수

인터뷰) 우리가 봤을 때 실제 북쪽에 나타난 별을 반대로 우리가 거울을 비췄을 때 모습이 대칭적으로 나타나죠. 그렇게 표시된 것이 지금 현재 대략 찾아본 북두칠성인데 이런 모습의 별자리가 특히 북한 지역에서 평양에서 발견됐다는 그 고인돌에도 그 고인돌 표면에도 이게 나타난 것이 있습니다.

 


청동기시대의 별자리는 암각화에서도 찾아 볼 수 있다. 경북 신흥리 마을 뒷산에 서 있는 오줌바위. 암각화 전문가인 이하우 선생은 이 바위의 한쪽 귀퉁이에서 별자리 모양을 발견했다. 이것은 카시오페아와 같은 모양이었다. 그런데 이 오줌 바위에는 카시오페아 외에도 여러 개의 다른 별자리가 그려져 있었다. 


이하우 암각화 전문가

설명) 이 꼭지점과 꼭지점을 이어서 똑바로 나가버릴 것 같으면은 어느 지점에는 북극성이 나타나게 돼 있죠. 그래서 찾아낸 바위구멍이 이 구멍입니다. 이것을 북극성으로 생각할 수 있어요. 중간에 바위구멍이 있고 둘레는 동심원을 하나 새겨놨죠.


북극성의 맞은편엔 익숙한 모양의 그림이 있었다.

 

 

이하우 암각화 전문가

설명) 카시오페아의 대척점에서 찾아낸 윷판 형상이 이거와 같습니다. 그랬을 때 이것을 북극성을 일주천하는 북두칠성의 별자리로 볼 수 있겠다는 거죠. 

 

 

고대의 유적에서 나타나는 윷판의 모양에는 여러 가지 설이 있지만 이하우 선생은 이 윷판이 북극성을 중심으로 돌아가는 북두칠성의 운행을 표현한 것으로 주장하고 있다. 결국 이 윷판은 북두칠성을 상징하는 그림이라는 것이다. 이하우 선생은 오줌바위의 한쪽 끝에서 또 다른 별자리를 찾아냈다. 이것은 전갈자리라고 했다. 이것은 암반을 탁본한 것이다. 이것을 실제의 전갈자리와 비교해 보았다. 모양이 거의 일치했다.


이하우 암각화 연구가

인터뷰) 선사사회에서 농경과 관계있지 않을까. 여름철은 파종한 이후 곡물이 성장하는 시기입니다. 이 성장하는 시기에만 전갈자리가 보인다는 것이죠. 그랬을 때에는 이 별자리를 새긴 선사인들의 마음속에는 농경에 대한 기준점 그리고 많은 수확을 기대하고자 하는 마음과 좀 더 과학영농을 할 때 별자를 이용했다는 증거물로서 전갈자리를 제시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신흥리 오줌바위에는 여름 별자리인 전갈자리를 비롯해 북극성을 중심으로 대칭점에 서있는 카시오페아와 북두칠성도 정확히 표시되어 있다 .이것은 청동기 시대 사람들이 별자리를 관측했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평안남도 용덕리에서 출토된 고인돌에도 북극성을 기준으로 11개의 별자리가 그려져 있다. 이미 기원전 10세기에 천문관측이 이루어졌던 것이다 .


평양 용덕리에서 발굴된 고인돌의 덮개돌에 이런 별자리가 새겨져 있었습니다. 그뿐만이 아니라 별자리의 모양이나 물론 별의 광도에 따라서 크기까지 다르게 표시해 놓았습니다. 마치 요즘의 별자리를 보는 듯이 아주 상세하게 그려놓았습니다. 이렇게 고조선 사람들이 천문관측을 했다는 것은 참으로 대단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 고조선시대 사람들은 국가에 중요한 일을 수행하기 전에는 이 천체관측을 하는 것이 아주 필수적이었습니다. 또 고조선시대 사람들은 절기를 파악해서 농사를 지었습니다. 그래서 그해 풍년이 들지 흉년이 들지를 알 수 있었고 방향까지도 아주 정확하게 계산을 할 수가 있었습니다. 자 이런 일을 모두가 천체관측을 할 수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습니다. 자, 지금까지 우리들은 고조선 사람들이 어떤 집에서 살았고 무엇을 먹고 살았는지 살펴보았습니다. 이제 고조선 사람들은 어떤 옷을 입고 살았는지 알아보겠습니다.



고조선은 모직물 수출국가였다


압록강 북쪽에 있는 중국 길림성 성성초, 이곳에서 기원전 8세기경의 고조선 유적이 발견됐다. 


중국인 

설명) 원래는 석관묘였다. 이전에는 여기가 물에 잠겨 있었는데 물이 빠지면서 무덤이 드러났다. 언제 발견했나? 1971년도에 발견했다.


2800년 전의 이 고조선 무덤에서는 비파형 동검과 함께 아주 희귀한 유물이 출토됐는데 바로 고조선 시대의 천 조각이었다. 당시 중국학자들의 분석에 의하면 이것은 개털과 양털을 섞어서 짠 모직물이었다. 전문가들은 고조선 시대에 이미 다양한 섬유의 생산이 이루어졌다고 보고 있다. 


박선희 교수

인터뷰) 고조선 사람들은 복식의 재료로서 가죽이나 모직물 또는 마직물 그 다음에 비단이라고 일반적으로 말씀합니다만은 비단은 중국에서부터 온 섬유고 저희도 중국과 같은 서기전 2700년경부터 누에를 키우고 실크섬유를 생산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중국의 비단이라든가 견섬유와 다른 고조선만이 갖는 고유한 실크 성유들을 다양하게 생산했습니다.

 

 

고조선의 유물 중에는 가락바퀴 즉 실을 감는 기구인 ,방추차가 광범위하게 분포한다. 이를 통해 고조선의 직물기술이 발달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고구려 대안리 고분벽화에는 베틀이 그려져 있는데 경사가 완만한 이 베틀은 고조선의 베틀을 계승한 것이다. 이것은 같은 시기에 사용한 중국의 베틀이다. 고조선의 것과를 달리 베틀의 경사가 가파르다. 


박선희 교수

인터뷰) 고대 중국과 고대 한국의 직기 구조상의 차이는 고대 한민족들이 오랫동안 고유한 직기로서 직물을 생산했음을 의미해주고 있습니다. 그 결과 고조선 시대의 직물과 당시대의 중국에서 출토된 직물들을 비교 분석한 결과 고조선에서 생산한 모직물이나 또는 면직물 마직물 또는 비던 섬유 등이 훨씬 현대 섬유에 가깝고......

 


직물기술이 발달했던 고조선의 의상은 어떠했는지 알기 위해 박선희 교수의 자문을 구했다. 고구려 벽화고분인 안악 3호 분에는 고조선의 의상을 계승한 복식이 잘 나타나있다. 특히 웃옷에 맨 옷고름과 왼쪽 여밈은 고조선시대부터 시작된 우리 의상의 특징이다. 고조선의 유물과 자료를 통해 당시의 의상을 복원해 보았다. 겉옷에 따라 두루마기 또는 저고리와 바지로 구분되는데 주로 한가지색의 단정한 형태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박선희 교수

인터뷰) 중국옷은 겉옷만이 크게 강조되는 그러한 분위기를 갖습니다만 우리 옷은 겉 옷 속에 겉옷보다 옅은 색의 속옷을 단정히 입어서 단아한 느낌을 주고 또 앞 여밈새에 옷고름을 달기도 해서 더욱 더 우아한 처리방식을 갖습니다.

 


중국의 역사서인 관자에는 고조선에 관한 기록이 나오는데 이것은 일찍이 직물기술이 발달한 고조선이 표범 가죽과 모직물을 중국에 수출했다는 사실을 알려주고 있다.


고조선이 수출국가였다면 그만큼 경제적으로도 넉넉했을 것이다. 중국 대련시에는 수출국 고조선의 면모를 파악할 수 있는 유적이 있다. 대련시 여순박물관에는 기원전 7-8세기 고조선유적으로 밝혀진 강상무덤의 유물들이 소장돼 있다.

 


무덤에서 한꺼번에 150명의 인골이 발굴되면서 순장무덤이라는 주장도 있지만 아직 정확한 성격은 밝혀지고 있지 않다. 단지 무덤의 주인이 이 지역의 세력가였음을 짐작할 수 있다. 그런데 강상무덤의 유물에서 중국 전한시대의 화폐인 오수전이 출토됐다. 그리고 인근지역에서는 중국 연나라 시대의 화폐인 명도전도 출토됐다. 왜 이곳에서 중국화폐가 나오는 것일까?


중국의 역사서 사기2)는 고조선이 중계무역을 통해 이익을 취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전해준다.


윤내현 교수 단국대

인터뷰) 당시의 중국화폐 명도전이라고 하는 중국화폐가 지금 북한지역하고 뭐 만주지역 그러니까 고조선의 영토내에서 굉장히 많이 출토되고 있습니다. 한 유적에서 많이 나온 것은 5천점, 4천점, 3천점, 이렇게 출토되고 있고 1-3백점 출토되는 곳은 여러 곳이 있습니다. 이런 걸로 봐서 고조선이 중국에 굉장히 많은 양의 물건을 수출했고 외화를 많이 획득했던 아주 외화 보유국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고조선은 중계무역으로 막대한 이익을 취하는 것은 물론 특산물의 수출을 통해 외화를 획득했다. 대외교류를 통한 부의 축적, 이것은 고조선이 강국으로 커나가는 든든한 기반이 된다. 


고조선은 수출국가였습니다. 대표적인 수출품으로는 모직물과 화살 화살촉 등의 무기류였다고 합니다. 고조선의 유적에서 출토되는 수많은 중국화폐들이 고조선이 수출국가였다는 것을 뒷받침해주고 있습니다. 자, 이 고조선이 수출을 했다는 것은 당시 고조선 사람들이 쓰고 남은 물건이 많았다는 얘긴데요. 이 고조선은 국내적으로는 농경과 방직기술이 무척 발달해 있었고, 국제적으로는 수출을 통해 중국으로부터 필요한 물건을 구입하거나 외화를 벌어들였습니다. 이렇게 부를 축적한 고조선은 국가 체제도 보다 강력해 졌을 것이고 국제적인 지위도 높아졌을 것입니다. 자, 그렇다면 당시 고조선은 이 동북아시아에서 어떤 위치를 차지하고 있었을까요?



고조선은 우두머리 국가였다


오랜 세월이 지나는 동안 고조선은 많은 변화를 겪었을 것이다. 그 한지점인 전성기에 고조선은 동북아시아의 강자로 떠오르고 있었다. 기록에 의하면 고조선의 영토에는 수많은 거수(渠帥)가 있었다고 하는데 이것은 고조선의 세력권을 알려준다.


윤내현 교수

인터뷰) 고조선이 건국되는 과정에서 여러 지역의 마을 연맹이 거기에 들어오게 됩니다. 근데 그 당시에는 오늘날처럼 중앙집권적인 행정조직이나 행정체계가 마련이 안 되어 있었으니까 그전에 있었던 각 지역의 마을 연맹체를 그대로 인정합니다. 그 마을 연맹체엔 추장들이 있었거든요. 그걸 인정을 하면서 중앙에 단군이라고 하는 최고 통치자가 그들을 거느리는 거죠. 그들에게 어떤 의무를 이행하게 하고 그래서 이 마을 연맹체들을 그대로 지역에 하나의 정치권력으로 인정을 해요. 이것이 거수국인거죠. 그리고 그전에 추장이었던 사람이 바로 그 지역의 권력자로 거수라고 불려지게 된 겁니다.


고조선의 거수국에는 고구려도 포함되어 있었다. 고구려의 수도 중국 집안에는 고조선과 고구려의 관계를 알려주는 기록이 있다. 바로 이 광개토대왕릉비다. 광개토대왕릉비문에는 고구려의 시조 추모왕의 출생이 적혀 있는데 추모왕은 천제와 하백의 딸 사이에서 태어난 자손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삼국유사에 의하면 하백의 딸의 남편이 단군으로 기록되어 있다 결국 추모왕은 단군의 자손 즉 고구려는 고조선을 계승한 것이다.


고조선의 전성기 그 중심지는 어디였는지 기록을 찾아보았다. 하지만 기록 속에서 발견할 수 있는 것은 왕검성이라는 이름뿐이었다. 현재 북한의 학자들은 고조선의 수도 왕검성이 단군릉이 있는 평양지역에 있었다고 주장하고 있다. 또한 대동강 남쪽에서 낙랑유적이 출토된 것으로 보아 왕검성이 이곳에 있었을 것이라는 추측도 있다. 그러나 고구려의 수도, 왕검성이 어디인지는 아직 밝혀지지 않고 있다.


서영수 교수

인터뷰) 전국 칠웅 중의 하나인 연나라와 서로 각축을 할 정도니까 그때의 고조선은 매우 큰 나라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런 큰 나라가 있다가 BC 4세기 말에서 BC 3세기 초엽이 큰 전쟁이 일어났어요. 전국 연나라와 싸워가지고 그때 고조선의 중심을 대동강 쪽으로 후퇴한 것으로 보입니다.

 

 

기원전 5세기 말 중국은 전국 7웅이 각축을 벌이는 전국시대로 돌입한다. 그 중 하나인 연나라의 침략으로 고조선은 중심지를 대동강으로 옮긴다. 그러나 그후 세력을 회복한 고조선은 연나라를 공격하여 그 동쪽 땅을 빼앗는다. 중국의 혼란기를 틈타 세력을 확장한 것이다. 기원전 206년 진나라를 멸망시키고 한나라가 중국의 통일왕조로 들어선다. 당시 한나라를 위협했던 최대의 적은 북쪽의 흉노와 동쪽의 고조선이었다.


송호정 교수 한국 교원대 역사교육학과

인터뷰) 당시 문헌사를 보면 고조선는 위만 조선이었는데 국가체제를 수립을 하고 중국황제에게 조공을 받친다든지 이런 것들을 이행을 하지 않고 또 남쪽 주변지역에 오랑캐 국가들이 중국에 조공을 받치거나 무역을 하는 것들을 중간에서 차단을 하고 중계무역을 하는 이런 행위를 하죠. 그 다음에 흉노족과 연결을 해 가지고 세력을 키우려고 한다고 하는 그런 기록들이 보입니다. 이러한 것에 대해서 중국 중심에 세계 질서를 구축하려고 하는 목적에서 결국에는 고조선에 대해서 침공을 하는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중국의 사기에는 고조선과 한나라의 전쟁이 상세하게 기록되어 있다. 기원전 108년 한나라는 육군 5만 해군 7천의 병력을 동원, 고조선을 공격한다. 당시 한나라는 육로와 해로를 이용해 양면작전을 펼친다. 한나라 누선장군 왕복은 7천명의 수군을 이끌고 산동반도를 출발한다, 그러나 의기양양하던 한나라 수군은 고조선의 기습공격에 궤멸되고 만다. 또한 5만의 한나라 대군은 고구려 수도 왕검성을 포위했으나 1년이 넘도록 함락시키지 못한 채 성 주위를 맴돌아야 했다. 이렇게 막강했던 고조선이 멸망한 이유는 다름 아닌 내부분열이었다. 기록에 의하면 기원전 108년 니계상 참이 왕을 죽이고 한나라에 항복한다.3)


서영수 교수

인터뷰) 동북아시아의 패자로 등장하면서 영역을 확대하려 했기 때문에 그 확대된 영역을 완전히 국가의 체제에 넣지 못했던 것이다. 그렇게 돼서 한 가지 멸망요인이 생겼던 것이죠. 두 번째는 위만조선시대에는 서북한 지역에만 국가가 형성된 것이 아니라 한강유역의 진국 동쪽의 고구려 부여등 여러 세력이 흥기했던 상황입니다. 이런 세력의 각축이 벌어져서 그런 각축 과정 속에서 위만조선이 멸망했죠.


오랜 세월 고대국가의 기틀을 잡고 동북아시아의 강자로 떠오른 고조선, 고조선은 그렇게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지금까지도 고조선이 우리역사에서 어떻게 사라졌는지에 대해서 잘 알려져 있지 않습니다. 그래서 더욱 고조선이 신화 속의 국가처럼 느껴졌는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고조선은 중국 한나라의 5만7천에 이르는 대군의 공격을 받고도 무려 1년을 버틸 정도로 강력한 국가였습니다. 그러나 결국 내부분열로 무너집니다. 고조선 멸망 후 고조선의 땅에서 일어난 고구려와 신라, 부여는 모두 단군의 후손을 자처하며 고조선을 계승해 나갔습니다. 이 고조선이 멸망하고 나서도 우리역사는 단절되지 않고 이어졌던 것입니다. 자, 여기 고조선이 있습니다. 비파형 동검을 사용했던 그들은 넓은 세력권을 형성하고 있었고, 그 세력권을 법으로 통제할 만큼 공권력이 성숙한 나라였습니다. 수준 높은 농경문화도 가지고 있었고 함께 작업의 분화도 이루어졌습니다. 모직물 수출국가로서 부를 축적한 고조선은 점차 세력을 확장하여 동북아시아의 강국으로 떠올랐던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고조선에 한발 가까이 다가갔습니다. 하지만 고조선에 대해서 풀어야 할 비밀은 아직도 많이 남아 있습니다. 이 고조선의 비밀을 풀어내는 일, 그것은 우리 역사의 빈장을 채우는 것이자, 우리 역사의 뿌리를 찾는 일입니다.


※ 저작권은 KBS <역사스페셜>에 있습니다. 상업적인 용도로 사용을 금합니다.


1) 창원 덕천리 고인돌

   

   이곳에서는 고인돌은 외형적으로 모두 6기가 확인되었으나, 발굴조사 결과 3기의 하부에서만 매장시설이 확인되었다. 고인돌은 대체로 남북축선상에 일렬로 배치되어 있다. 매장유구가 확인된 3기의 고인돌은 덮개돌이나 묘광의 규모에 있어 차이가 있기는 하나, 단이 지게 묘광을 파고 그 아래에 석곽형의 유구를 축조한 점이 공통된다. 이들 고인돌은 개석을 1겹 이상 덮고 개석과 개석사이 또는 개석 윗부분은 적석을 하고 있으며, 외형상 원형의 봉토처럼 보이는 적색-황색토가 덮여 있다. 이 유적은 이제까지 일반적으로 인식되어 온 고인돌과는 여러 가지 점에서 상당한 차이가 있어, 일반적인 고인돌에 대한 개념과 특히 청동기시대 사회체제에 대한 개념에 있어 획기적인 인식의 전환을 가져온 유적이라는 점에서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첫째, 이 유적에서는 분묘공간과 생활공간을 의식적으로 따로 마련하였던 것으로 보이며, 삶과 죽음에 대한 공간 분할이 이루어진 것으로 보인다. 둘째, 고인돌은 하부구조가 확인된 일반적인 고인돌과는 많은 구조적 차이가 있다. 즉 덮개돌에 비해 묘광을 매우 크게 파서 아래로 단을 지웠으며, 개석을 1겹이상 중첩되게 하거나 개석과 개석사이에 수백개의 돌로써 적석한점, 구지표면에서부터 적색-황색토를 둥글게 쌓아 올려 외형상 봉토처럼 보이게 하고 그 위에 덮개돌을 얹거나 또는 적색-황색토로써 봉토처럼 둥글게 만들고 난 후 묘광을 파 내려간 점등은 그 유례를 찾기 어려운 독특한 구조를 하고 있다. 이러한 구조에 있어서의 특징은 고인돌의 축조가 단지 거대한 덮개돌의 이동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크고 깊은 묘광을 파고 수십매의 개석을 다듬어 옮기거나 그러한 개석을 깊은 묘광안에 정연하게 쌓는 등의 기술적인 문제에 대한 재검토를 요구한다. 셋째, 1호 고인돌의 경우 우선 무덤 자체가 다른 분묘에 비하여 클 뿐만 아니라 묘역도 56×17.65m에 달해 전체 분포의 1/3가량을 이 무덤이 차지하고 있다. 이러한 무덤의 크기와 묘역은 피장자의 사회적 신분 차이를 반영하는 것으로 생각된다. 넷째, 고인돌에 사용된 석재들 특히 석축에 사용된 석재들은 당시의 석재가공 기술이 일반적으로 인식되어온 것보다는 고도의 기술을 보이는 것으로, 전문성을 띤 기술집단의 존재를 상정할 수 있다. 다섯째, 1호 고인돌 주변을 둘러싸고 있는 석축 내부에서 다량의 무문토기와 함께 석착, 숫돌들이 나타나고 있는 점으로 보아 의례행위의 증거로 볼 수 있으며, 특히 유물들이 석축의 모서리를 중심으로 집중적으로 분포하고 있는 점등은 매장과 관련된 의례행위가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고인돌에 대해 더 알고 싶다면 http://cafe.daum.net/hanfuture/5eze/263 에 들어가 보시라. 자세히 설명되어 있다.



2) 조선의 우거왕이 전국과 한이 교류하는 것을 가로막았다.

3) 史記에 기록되어 있다.

by 용파더 | 2009/09/09 08:27 | 상고시대(펌) | 트랙백 | 덧글(0)

간도는 우리땅 증거 찿았다

*다음카페-상촌 김자수 선생 기념사업회  글쓴이: 금소영당/김현숙  

                                                                 http://cafe.daum.net/hskk2005-5/VVl/1706

var articleno = "17046192";

‘간도는 우리땅’ 증거 찾았다



18세기 이후 조선과 청의 국경을 나타내는 인공울타리(흙무더기나 돌무더기)의 흔적이 위성영상을 통해 백두산 천지 동남쪽에서 처음으로 확인됐다. 경향신문 뉴스메이커 간도특별기획취재팀은 최근 1m급 위성영상(2004년 6월12일 촬영)을 입수, 고지도 등을 참고해 양국간 경계를 추적한 결과 이같은 사실을 발견했다.


위상영상 전문 판독기업인 위아(주)는 “19세기말 등의 고지도와 비교한 결과 압록강과 송화강의 상류를 연결하는 토퇴와 석퇴 등 인공물의 윤곽이 1.5㎞ 이상 연결돼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고 설명했다.

이로써 그동안 중국측이 주장해온 압록강~두만강 국경 주장은 허위임이 드러났으며 1712년 백두산 정계비 건립 이후 계속된 300년간의 국경논란도 우리 측 주장이 설득력을 갖게 됐다.

특히 송화강의 지류인 토문강과 동쪽의 압록강 사이를 잇는 울타리가 양국간 국경선임이 밝혀짐에 따라 현재 연변조선족자치주에 속하는 간도 지역이 한국땅임도 입증된 셈이다.

인공울타리 흔적은 백두산 장군봉에서 내려오는 길을 따라 남쪽으로 향하다 꺾어져, 토문강의 마른 하천을 끼면서 동쪽으로 800m가량 이어지고 있다. 이후 600m 정도 불분명해진 선은 다시 300m가량 나타난다.

위성영상 판독 전문가인 이승연씨는 “지난해 중국 지안의 환도산성과 발해 상경 성곽을 위성영상을 통해 판독할 때에도 이런 띠가 나타났다”며 “영상 속에서는 작은 길처럼 보이지만 윤곽의 형태가 돌무더기 띠일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고 밝혔다.

울타리 흔적이 나타난 토문강은 위성영상에서 두만강이 아닌 송화강으로 흘러들어간다.

이씨는 “전체 지리를 살펴볼 수 있는 15m급 위성영상에서 토문강이 송화강으로 흘러들어감을 확인했다”고 말했다.

간도문제 전문가인 노계현 전 창원대 총장(외교사)은 “정계비 건립 당시 양쪽의 강 물줄기를 경계로 했다는 역사적 기록이 있는 만큼 조선과 청의 국경이 압록강과 송화강이었음을 보여주는 이번 위성영상 판독결과는 역사적 사실과도 부합한다”고 밝혔다.

조선후기 국경사를 연구해온 경인교대 강석화 교수(사학)는 “위성영상을 직접 확인해보니 토문강과 압록강 사이를 돌무더기로 연결했다는 18, 19세기 당시 사서의 내용이 사실임이 드러났다”면서 “이번 확인이 앞으로 학계에 큰 파장을 불러일으킬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윤호우기자 hou@kyunghyang.com

by 용파더 | 2009/09/08 13:18 | 조선시대(펌) | 트랙백 | 덧글(0)

고구려 -조의선인

조의선인(早衣仙人)이란 '검은 빛깔의 조복(早<검은 비단 조, 검을 조, 사실은 白밑에 十또는 七임>服) 을 입은 선인'이란 뜻으로 선배 또는 선비라 불렀다. 선배는 고구려의 10월 제사에 모인 군중 앞에서 무예를 선보인 데서 비롯되었고 선인(先人 또는 仙人)은 선배의 이두(吏讀)식 표기이다.

사냥과 가무, 무예 등의 여러 경기에서 승리한 사람을 선배라 불렀고 이들은 국가에서 급료를 받아 생활하면서 무예와 학문을 갈고 닦았다. 전시에는 이들이 자체부대를 조직하고 전장에 나가 정예군으로 활동했다. 선배는 머리를 박박 깍고 검은 옷을 입었으므로 전형적인 무사를 연상시킨다. 선배는 화랑보다도 훨씬 오래되었다.

화랑은 원화(源花)라는 여성에서 비롯되어 나중에 좋은 가문의 청년 중에 덕행 있는 자를 곱게 치장하여 화랑으로 만든 것에서 보듯이 외모와 몸치장을 중시하여 여성적인 반면 선배는 매우 남성적이다. 선배의 독특한 외양 때문에 고구려와 전쟁을 하였던 수, 당의 병사들은 이들을 승군(僧軍)으로 착각하기도 했다.

그래서 고구려를 숭상(崇尙)한 고려의 최영 장군조차 '당이 30만 대군으로 고구려를 침략하나 고구려는 승군(僧軍) 3만을 내어 이를 대파하였다.' 라고 선배를 찬양하였다. <고려도경(高麗圖經)- 원명은 《선화봉사고려도경(宣和奉使高麗圖經)》송(宋)나라 휘종(徽宗)이 고려에 국신사(國信使)를 보낼 때 수행한 서긍(徐兢)이 송도에서 보고들은 것을 그림을 곁들여서 기록한 책>에 나오는 재가화상(在家和尙)은 선배의 후예로 알려져 있다.

조의선인의 눈부신 활약이 기록으로 보이는 것이 안시성 전투였다. 당태종의 당군(唐軍)은 요동의 여러 성들을 차례로 함락시키고 많은 공성기구(攻城機具)를 사용해 안시성을 맹렬히 공격했지만 고구려군의 완강한 저항으로 실패했다.

그래서 당태종은 60일 동안 50만을 동원하여 성을 내려다보고 공격하기 위해 성의 동남쪽에 높은 토산을 쌓게 했는데 토산이 무너져 안시성 성벽을 치는 바람에 성벽 일부가 붕괴되어 매우 위태로운 상황이 되었다. 이때 고구려군 결사대가 일제히 돌격하여 당군을 물리치고 토산을 점령해 버리고 주변을 깎아 나무를 쌓아 불을 놓고 지키니 얼씬도 못했다고 한다.

기록은 이 장면을 '이때 성안에서 검은 옷을 입은 백 명의 용사가 뛰어나와 천장의 거미줄을 걷어내듯 당나라 2만 기병을 산 아래로 팽개치고는 오히려 토산을 차지해 버렸다' 라고 적고 있다. 이 검은 옷의 용사(勇士)들을 조의선인이라 부른다. 당시 고구려의 조의선인은 3만여 명에 달했고, 그 수장은 연개소문이었다고 한다..

조의선인은 선비제도라는 특별한 교육체계에 의해 양성되는 문무겸전의 인재들이다. 이들은 대체로 유년의 어린 나이에 선발되어 신체발달에 부응하는 매우 정교한 지적, 정서적, 신체적 훈련과 교양을 통하여 보다 완벽한 심신의 능력을 갖게 된다.

조의선인은 누구보다도 사물과 현상을 깊이 인식하고, 그것들이 부딪치는 문제의 실상을 정확히 파악하며, 이를 해결할 심리적, 물질적 능력을 갖도록 조련된다. 을파소나 명림답부, 을지문덕 등 역사에 이름을 남긴 이들도 모두 조의선인들이었고, 우리 문화전통에서 말하는 선비란 바로 이들이 가지고 있는 덕성과 실천력에 뿌리를 두고 있다.

고구려 제22대 안장왕(安臧王)때의 조의선인으로 선발되었던 을밀선인(乙密仙人) 문하에는 조의선도 3,000명이 다물방지가(多勿邦之歌)를 부르며 심신을 수련했다고 한다.

(다물:"되물린다"라는 뜻으로 단군조선시대의 태평성국으로 복고하겠다는 의지를 뜻함) 단군조선의 국자랑(國子郞) 혹은 천지화랑제도가 고구려에 와서는 조의선인 제도로, 백제에서는 무절(武節-일본의 사무라이(武士)로 이어짐)로 발전했으며, 신라에서는 화랑도로 이름이 바뀐 것이다.

신라의 화랑제도가 시작되기 2,500여 년 전인 단군조선 시대에 독서와 활쏘기를 익히며 심신을 단련하던 미혼의 자제들을 국자랑(國子郞) 이라 했으며(11대 단군인 도해단제 재위 57년 -단기 3891년, 서기 전 1891년), 그들이 출행할 때에는 머리에 천지화(天指花: 무궁화)를 꽂았기 때문에 천지화랑(天指花郞)이라고도 했다한다..(13대 홀달단제 20년- 단기 3763년, 서기 전 1763년).

조선상고사에서 단재 신채호선생은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고구려의 강성은 선배제도의 창설로 비롯된 것인데 그 창설한 연대는 전사에 전해지지 아니하였으나 조의의 이름이 태조왕 본기에 처음으로 보였으니 그 창설이 태조, 차대 두 대왕 때가 됨이 옳다.

'선배'는 이두자로 선인(先人), 선인(仙人)이라 쓴 것으로써 여기서의 선인(仙人)은 선배의 소리말 '선'이요 인은 '선배'의 배를 빌려 쓴 이두문이며, 백의 (帛衣), 조의(早衣)는 우두머리 <上首>의 옷과 빛깔, 예속은 무사 모의 깃 절풍(折風)에서 유래한 것이다.

학자들간의 선인(先人, 仙人)을 관직으로만 보는 견해가 있으나 발해사에 선인을 '사 정병(士正兵)'이라 하고, 삼국 사기에 '선비는 싸움에 당(當)하여 물러서지 아니한다'고 한 것을 보아도 선인이 '선배'라 부르던 무사단(武士團)에서 유래한 이름을 알 수 있다.

'선배'는 원래 신수두(臣蘇塗) 교도의 보통 명칭이었는데 태조왕 때에 와서 해마다 3월과 10월 신수두《臣蘇塗: 신수두는 하느님(天帝,天神)을 모신 대신단(大神壇)이 있는 가장 신성한 숲(樹林)인데 하늘에 제사지내는 마니산 참성단이 이에 해당한다.

수두(蘇塗)는 신수두(臣蘇塗)의 대신단(大神壇) 을 본받아 각지방에 만든 신단(神壇)으로 마을마다 남아있던 당산(堂山)의 당집,신목(神木)등은 그 유물들이다.》 대제에 모든 사람을 모아 혹은 칼로 춤을 추고 혹은 활도 쏘며, 혹은 깨금질도 하고, 혹은 택권(택견)이도 하며, 혹은 강의 얼음을 깨고 물 속으로 들어가 물싸움도 하고 혹은 가무(歌舞)를 연(演)하여 아름다움과 추함<美惡>을 보며, 대수렵을 행하여 그 잡은 양<射獲>의 많고 적음을 보아 그 내기에서 승리한 사람<一者>를 ' 선배'라 칭하고 선배된 사람에게는 국가에서 녹(祿)을 주어 그 처자를 먹이어 가실(家室)에 누(累)가 없게 하였다.

(온달과 평강공주에 보면 온달은 3월3일 낙랑언덕에서의 사냥대회에서 1등을 함으로써 선배로 뽑힌다.) '선배'가 된 사람은 각기 편대를 나누어 한 집에서 먹고 자며, 앉으면 고사(故事)를 외우고<講> 학예를 익히며 나가면 산수를 탐험하거나 성곽을 쌓거나 도로를 닦고 군중을 위하여 강습(講習)하거나 일신(一身)을 국가와 사회에 바쳐 모든 어려움<困苦>을 사양치 않았다.'

선배중에서 선행과 학문과 기술이 가장 뛰어난 자를 뽑아서 스승으로 섬긴다. 일반 선배들은 머리를 깎고 조백(早帛)을 허리에 두르고 그 스승은 조백으로 옷을 지어 입으며 스승 중의 제일 우두머리는 '신크마리'-두대형 혹은 태대형-이라 일컫고, 그 다음은 '마리'-대형-이라 일컫고, 맨 아래는 소형이라 일컬었다.

전쟁이 일어나면 '신크마리'가 모든 '선배'들을 모아 스스로 한 단체를 조직하여 싸움터에 나아가서 싸움에 이기지 못하면 싸우다가 죽기를 작정하여 죽어서 돌아오는 사람은 인민들이 이를 개선하는 사람과 같이 영광스런 일로 보고, 패하여 물러나오면 이를 업신여기므로 '선배'들이 전장에서 가장 용감하였다.

당시 고구려의 여러 가지 지위는 거의 골품(명문)으로 얻어 미천한 사람들이 높은 지위에 오르지는 못하였지만 오직 '선배'의 단체는 귀천이 없이 학문과 기술로 자기의 지위를 획득하므로, 이 가운데서 인물이 가장 많이 나왔다.

해상잡록(海上雜錄)에서도 '명립답부(明臨答夫), 연개소문( 淵蓋蘇文)은 조의 선인 출신이다.' 라고 하였고 또 연개소문의 아들 남생(男生)이 '총명하여 9세에 선인의 한 사람이 되었다.' 하였으니 그 사실로도 선인(先人)이 단순한 관직명이 아니고 무사단 '선배'에서 비롯된 것임을 알 수 있다.

지금 함경북도 재가화상(在家和尙)이라는 것이 곧 고구려의 선배의 유종(遺種)이니 고려도경에 "재가화상은 화상(和尙:중)이 아니라 형(刑:형벌)을 받고 난 사람으로 중과 같이 머리를 깎았으므로 화상이라 한다"고 하였는데 이는 실제와 맞는 말이다.

그러나 형벌을 받은 사람이라고 한 것은 서긍(徐兢)이 다만 지나(支那 china:중국) 한대(漢代)의 죄인을 머리를 깎고 노(奴:노비)라 일컫는 글로 인하여 드디어 재가화상을 형벌 받은 사람이라 억지 판단을 한 것이다.

대개 고구려가 망한 뒤에 선배의 남은 무리들이 오히려 구 유풍(遺風)을 유지하여 마을에 숨어서 그 의무를 수행하여 왔는데 선배란 명칭은 유교도(儒敎徒 -글읽는 사대부를 선비라함)들에게 빼앗기고 그 머리를 깎은 까닭으로 재가화상이라는 가짜 명칭을 가지게 된 것이고 후손이 가난해서 학문을 배우지 못하여 조상의 옛 일을 갈수록 잊어 자기네의 내력을 스스로 증명하지 못한 것이다.

송도(고려수도 개경)의 수박(手搏)이 곧 선배 경기의 하나이니, 수박이 지나(支那)에 들어가서 권법(拳法)이 되고, 일본으로 건너가서 유도(柔道)가 되고 조선에서는 이조에서 무풍(武風)을 천히 여긴 이래로 그 자취가 거의 전멸하였다.

고구려의 선배제도는 조선의 선비정신으로 이어져 나라에 국난이 일어날 때마다 분연히 일어서 외적을 물리쳤다. 임진왜란 때의 이순신, 권율, 김시민, 곽재우, 김덕령 등 여러 장군들과 그 외 크고 작은 의병들을 이끌고 왜병을 공격했던 의병장들이 바로 이들이다.

이들은 평소에 학문과 무예를 부지런히 갈고 닦아 국난에 대비했던 것이다. 흔히 권율 장군은 문과에 급제했으니 문관으로만 알고 있지만 그는 항상 병법을 연구하고 나라안의 여러 지역들을 두루 유람하며 지형과 지세를 면밀히 살폈으며 검술에도 아주 뛰어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는 행주대첩에 앞서 1592년 남원에서 1천여 명의 전라도 의병(義兵)들을 모집하여 금산에서 무주로 넘어가는 배고개(梨峙)에서 금산에서 전주로 들어오려는 고바야카와 다카카게<小早川隆景>의 왜군 정예부대를 맞아 치열한 격전을 벌였다.

1진을 용감하게 지휘하던 동복현감(同福縣監) 황진(黃進)이 격전 중에 적탄을 맞아 중상을 입고 쓰러져 사기가 떨어지고 1진의 전열이 무너지자 2진에 있던 권율장군이 벽력같이 호령하며 도망치던 군사들을 베면서 독전(督戰)을 계속하여 왜군을 크게 격파하고 호남을 보존하였다.

권율장군의 군영(軍營)은 군기(軍紀)가 매우 엄정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전투 중에는 이곳 저곳 돌아다니며 군사들을 독려하는 한편, 제대로 싸우지 않는 비겁한 병사들은 벙거지에 칼끝으로 표시해 두었다가 전투가 소강상태에 이르면 즉시 끌어내 즉결처형을 했다 한다.

선비정신은 일제하의 여러 독립운동가들의 독립운동에도 영향을 끼쳤다. 이등박문(伊藤博文)을 사살한 안중근 의사는 말타기와 사격을 잘 했는데 뛰어난 명사수였다고 한다. 청산리대첩으로 유명한 김좌진장군은 어려서부터 병법서를 즐겨 읽고 말타기와 칼쓰기를 부지런히 익혔는데 나라가 망해가자 15세에 종들을 해방시키고 재산을 모두 나누어 준 뒤 독립운동에 투신했다.

만주에서 그를 만나본 독립운동가들의 말에 의하면 그는 동서양의 군사학에 통달해 있었다고 한다. 청산리 야간전투 때 독립군이 산정에 먼저 올라가서 양쪽으로 포위해 들어오는 일본군에게 맹렬한 공격을 가한 후 일본군이 거의 올라왔을 때 살짝 빠져나감으로써 일본군들끼리 싸워 많은 사상자가 났는데 이를 두고 이범석 장군은 회고록에서 김좌진 장군의 뛰어난 전술이라고 찬양하고 있다.

고구려는 망했지만 그들의 정신은 면면히 이어져 나라를 구했다. 이제는 이 정신을 계승하여 국가를 발전시키고 강대국들을 누르고 또한 잃었던 옛 땅도 되찾아 다시는 중국인들의 망언이 없도록 해야할 것이다. 더 나아가 단군 할아버지의 '널리 인간을 이롭게 한다' 는 홍익인간(弘益人間)의 정신을 구현시켜 모든 나라들이 더불어 잘 살 수 있도록 해야 할 것이다.
내용출처 : [기타] 인터넷 : 한단고기(桓檀古記)- 임승국 역(譯) 조선상고사- 신채호 상식 밖의 한국사- 남경태, 새길(1995)

by 용파더 | 2009/09/03 16:52 | 상고시대(펌) | 트랙백 | 덧글(0)

신라 문무왕릉비 조각 200년만에 재발견


조선시대에 발견됐다가 다시 실종됐던 신라 문무왕릉비의 조각이 200여년만에 다시 발견됐다.

국립경주박물관(관장 이영훈)은 지난 2일 경주시 동부동의 한 주택에서 신라 문무왕릉비의 상단부분을 확인했다고 3일 밝혔다.

조선시대 경주부윤을 지낸 홍양호(1724-1802)의 ’이계집(耳溪集)’은 682년 경주 사천왕사에 세워졌던 문무왕릉비의 조각들을 정조 20년인 1796년에 발견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 조각들의 탁본은 청나라 금석학자 유희해(劉喜海.1793~1853)에게 전해져 그가 쓴 ’해동금석원(海東金石苑)’에 내용이 실렸다.

이 조각들은 그 이후 있는 곳이 다시 묘연했으나 1961년 비석의 하단 부분이 경주시 동부동에서 발견돼 국립경주박물관에 소장돼 있으며 이번에 상단 부분이 발견됐다.

상단 부분은 주택의 수돗가에 박혀 있었으며 표면이 훼손되고 가장자리 등 일부는 심하게 마모됐지만 비문의 전체 내용을 읽는데는 큰 어려움이 없다고 박물관 측은 설명했다.

진정환 학예연구사는 “’해동금석원’에서 제대로 밝히지 못한 일부 글자도 실제 조각과 비교하면 추가로 판독할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면서 “조각을 안전하게 박물관으로 옮겨 보존처리를 진행할 계획”이라고 말했다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09/09/03/2009090300678.html?Dep0=chosunmain&Dep1=news&Dep2=headline1&Dep3=h1_09

by 용파더 | 2009/09/03 15:10 | 트랙백 | 덧글(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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